[한국사]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 기출 요약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제1차 농민 봉기 후,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조선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통해 경제적 이권 탈취와 함께 침략의 기반을 닦기 위해,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내정 개혁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일본군이 먼저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1894년). 그리고 일본은 친일 내각을 수립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했다.

 

교정청

조선 정부가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주로 조세 개혁을 결정하였다.

 

제1차 갑오개혁

제1차 김홍집 내각

일본은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다.

김홍집 내각은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제1차 갑오개혁, 1894년 7월).

일본은 청⋅일 전쟁 중이라 조선에 내정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자주적인 개혁이 가능했다.

 

군국기무처

입법권을 가진 초정부적인 개혁 추진 기구이다

 

개혁 내용

정치

  • 개국 기원 사용
  • 기존 6조에서 8아문으로 개편
  • 왕실 사무와 행정 사무 분리
  • 과거제 폐지

 

경제

  • 탁지아문으로 재정의 일원화
  • 조세의 금납화
  • 도량형의 개정 통일
  • 은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

 

사회

  • 신분제 폐지
  • 과부의 재혼 허용

 

제2차 갑오개혁

배경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유리해지자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일본에서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여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제2차 김홍집 내각

고종은 종묘에 나가 독립 서고문을 바치고,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의 성격을 지녔다.

 

개혁 내용

정치

  • 내각제 도입
  • 8아문을 7부로 고쳐 내각을 편성
  • 지방 행정을 8도를 23부로 개편

 

사회

  • 교육 입국 조서를 반포

 

군사

  • 훈련대와 시위대 창설

 

중단

당시 일본이 삼국 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내각 대신들, 특히 내무 대신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되었다.

그러나 민비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된 박영효가 민씨 일파에 의해 실각됨에 따라 개혁은 중단되었다.

 

삼국 간섭

한반도와 만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도록 만든 사건

 

을미개혁

을미사변(1895년)

삼국 간섭 등으로 박영효가 실각한 뒤,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 은 낭인을 동원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제4차 김홍집 내각

을미사변 후 친일 성향의 제 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을미개혁이 추진되었다.

 

개혁 내용

정치

  • ‘건양’ 연호를 사용

 

사회

 

중단

을미의병

개항 이후 계속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관파천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을미의병과 아관 파천으로 인하여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갑오개혁·을미개혁의 의의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전통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농민층의 개혁 요구도 일부 반영한 근대적인 개혁이었다.

하지만 당시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군사적 개혁이나 농민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녔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교과서(금성출판사, 비상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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