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조선 전기 왕별 업적 및 사건 – 기출 요약

조선의 건국

신진 사대부신흥 무인 세력

고려 말 권문세족이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한 상황에서, 정도전,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은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와 손을 잡고, 기울어 가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위화도 회군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년)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신진 사대부의 분화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다른 의견이 존재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혁명을 주장하였다.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역성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신진 사대부의 분화

온건 개혁파는 비리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고 대토지 사유는 정리하되, 왕조 질서를 파괴하거나 전면적인 토지 개혁에는 반대하였다. 반면, 급진 개혁파는 역성 혁명을 찬성하고, 권세가에 의한 토지 사유를 축소시키려 하였다.

 

과전법 시행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우왕과 최영을 몰아 내고 실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1391년)을 실시하였다.

 

조선 건국

신흥 무인 세력과 급진 개혁파는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1392년).

 

조선 태조

국호 ‘조선

새 왕조를 세운 세력은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

 

한양 천도

태조는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다.

 

한양 천도

한양은 고려 3경 중의 하나로 풍수지리설에서도 명당으로 불리던 곳이다. 태조는 즉위 당시에는 개경을 그대로 수도로 삼으려 하였으나,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천도를 결심하고 후보지를 물색하여 1394년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정도전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 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정도전의 정치 사상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괄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조선 태종

왕자의 난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 공신 세력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6조 직계제

태종은 도평의사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두면서 그 정치적 권한을 약화시키고, 6조 직계제를 채택하였다.

 

6조 직계제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제도

 

사간원 독립

태종은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양전 사업

태종은 양전 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호패법

태종은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으며, 이를 조세 징수와 군역부과에 활용하였다.

 

사병 철폐

태종은 사병을 없애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태종 때에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주자소와 계미자

태종 때에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였다.

 

신문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여,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세종

세종은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였다.

 

집현전 설치

세종은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두고 젊은 학자들을 모아 깊이 있는 학문 연구를 장려함으로써 유교 정치와 민족의 전통 문화를 꽃피웠다.

 

집현전의 기능

집현전 학사는 학문 연구와 아울러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를 자문하였다. 이 기능은 뒤에 홍문관으로 이어졌다.

 

의정부 서사제

세종은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 체제를 바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의정부 서사제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훈민정음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1443년)하여 반포하였다(1446년).

 

4군 6진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쓰시마섬 정벌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계해약조

3포 개항 이후 세종 25년(1443년)에 계해약조를 맺어 쓰시마 도주에게 세사미두 200석, 세견선 50척으로 허용해 주었다.

 

지도·지리지

세종 때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고,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신찬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삼강행실도

세종 때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과학

천체 관측기구로 혼천의(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이 만들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년)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칠정산

세종 때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다.

 

칠정산(七政算)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의 7개의 운동하는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서술한 역법서

 

갑인자

세종 때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총편등록

세종 때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다.

 

조선 세조

계유정난

세종 이후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곧,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이 넘어가자, 수양 대군(세조)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1453년).

 

6조 직계제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를 다시 6조 직계제로 고쳤다.

 

집현전 폐지

세조는 자신의 활동을 견제하는 집현전을 없앴다.

 

직전법

세조는 나라의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직전법을 실시하였다.

 

직전법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

 

조선 성종

경국대전

성종은 건국 이후의 문물 제도의 정비를 완비하였으며, 경국대전의 편찬을 마무리하여 반포함으로써 이후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홍문관

성종은 홍문관을 두어 관원 모두에게 경연관을 겸하게 함으로써 집현전을 계승하였으며, 정승을 비롯한 주요 관리도 다수 경연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편찬

성종 때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악학궤범이 간행되었다.

 

조선 연산군

무오사화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무오사화(1498년)는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화로, 김일손의 사초에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일이었는데,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선 단종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갑자사화

연산군의 전횡이 심해지자, 3사는 연산군에 대한 간쟁의 수위를 높여 갔고, 대신들 또한 연산군의 실정에 대해 논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결국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와 폐비 윤씨 사건의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1504년).

 

조선 중종

3포 왜란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이 일어났다.

 

기묘사화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청렴함과 원리 원칙에 충실한 태도는 남곤⋅심정 등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조광조의 개혁 정치

조광조는 추천에 의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고, 도덕을 중요시하는 정치를 펴고자 하였다.

 

조선 명종

을사사화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또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1545년).

 

을묘왜변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였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을묘왜변

3포를 개항한 이후 왜인들은 약조를 지키지 않고 자주 소란을 피웠다. 특히, 1555년(명종 10)에는 왜인이 70여 척의 배를 몰고 전라남도 연안 지방을 습격해 왔다.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일시 단절되었다.

 

직전법 폐지

1556년 명종 때 직전법이 폐지되어 수조권 지급 제도가 없어졌다.

 

조선 선조

임진왜란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 왔다(1592년).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광해군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인 공빈 김씨의 소생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1608년에 선조가 병으로 죽자, 왕위를 물려 받았다. 서자로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과 관련하여 붕당 정치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결국 서인에 의해 쫓겨났다.

 

전란 수습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일으켰다.

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을 되살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중립 외교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였고,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를 명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였다.

 

인조 반정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조선 인조

정묘호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이괄의 난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병자호란

그 후,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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