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제7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8번 기출 해설

문제

28. 다음 자료에 나타난 상황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진주 안핵사 박규수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민들이 스스로 죄에 빠진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 살을 베어 내고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은 환곡과 향곡이 으뜸입니다. 진주에서 허위로 부과한 세금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 결과를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 병들어 가는 것은 우리 백성들뿐입니다.”라고 하였다.

① 홍경래 등이 봉기하여 정주성을 점령하였다.

② 신돈이 중심이 되어 전민변정 사업을 운영하였다.

③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고자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다.

④ 기금의 이자로 빈민을 구휼하는 제위보가 만들어졌다.

⑤ 황사영이 외국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는 백서를 작성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진주 안핵사 박규수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민들이 스스로 죄에 빠진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 살을 베어 내고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은 환곡과 향곡이 으뜸입니다. 진주에서 허위로 부과한 세금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 결과를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 병들어 가는 것은 우리 백성들뿐입니다.”라고 하였다.

1862년 조선 후기 철종 시기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임술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정부에서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고,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① 홍경래 등이 봉기하여 정주성을 점령하였다.

홍경래의 나는 1811년에 발생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신돈이 중심이 되어 전민변정 사업을 운영하였다.

신돈은 고려 후기 인물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고자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기금의 이자로 빈민을 구휼하는 제위보가 만들어졌다.

제위보는 고려 시대 기구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황사영이 외국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는 백서를 작성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박해 소식과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을 알리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장 구베아에게 보내려고 했던 밀서가 발각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철종 때에 진주에서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1862년)는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 삼정이정청 설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 홍경래의 난(1811년)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 과정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 의의와 실패 원인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의 농민이 하나로 뭉쳐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어 일어났고,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 영향

그러나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 뒤에 발생한 임술 농민 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고려
공민왕
  •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
  •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며, 몽골 풍속을 금지
  •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 쌍성총관부 공격, 철령 이북의 땅 수복
  • 정방 폐지
  • 전민변정도감 설치
  • 승려 신돈 등용
  • 성균관 개편
고려
백성의 생활 모습
  • 향도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香徒)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이다.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 의창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 상평창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동⋅서 대비원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다.

 

  • 혜민국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하게 하였다.

 

  • 구제도감·구급도감

각종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 제위보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 혼인과 여성의 지위

고려 시대에는 여자는 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에 혼인을 하였다.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하였다. 중기 이후 여러 번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 여성의 지위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조선 후기
천주교의 전파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 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 천주실의

원래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지었으나,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18세기에 한글로 옮겼다.

 

  • 이승훈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 탄압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의 교세가 커진 것은 세도 정치로 말미암은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 신해박해

정조 때인 1791년 윤지충 등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고, 이를 계기로 이들을 처형하였다.

 

  • 신유박해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집권하자, 천주교에 대탄압이 가해졌다. 1801년 이승훈, 정약종 등 3백여 명이 처형되었다. 정약용은 유배되었다.

 

  •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박해 소식과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을 알리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장 구베아에게 보내려고 했던 밀서가 발각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기출 문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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