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제7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2번 기출 해설

문제

22. 다음 시나리오의 상황 이후에 전개된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11. 남한산성 안

임금이 항복하라는 내용이 담긴 칸[汗]의 서신을 읽은 후 대신들에게 말한다.

임금: 앞으로 어떤 계책을 세워야 하겠는가?

김상헌: 지금 항복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노여움을 풀겠습니까. 끝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 올 것입니다. 적의 글을 우리 군사들에게 널리 알려 사기를 높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최명길: 칸이 직접 출병한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임금: 성문과 성벽을 굳게 지키면서 속히 회답해야 할 것이다.

① 강홍립 부대가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였다.

② 김종서가 두만강 일대에 6진을 개척하였다.

③ 김시민이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④ 이종무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⑤ 이완이 어영대장으로 임명되어 북벌을 준비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입했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위 자료의 내용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당시 상황이다.

병자호란으로 청과의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조선은 효종이 즉위한 후 북벌을 준비하게 된다.

조선 세종 시기 이종무의 쓰시마섬 정벌
조선 세종 시기 김종서의 6진 개척
조선 선조 시기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
조선 광해군 시기 강홍립 부대의 사르후 전투 참전
인조 반정
조선 인조 시기 병자호란
조선 효종 시기 북벌 준비

 

① 강홍립 부대가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였다.

광해군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김종서가 두만강 일대에 6진을 개척하였다.

조선 세종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김시민이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조선 선조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이종무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조선 세종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이완이 어영대장으로 임명되어 북벌을 준비하였다.

병자호란 후 조선 효종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조선 세종
  • 집현전 설치 – 집현전 학사는 학문 연구와 아울러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를 자문하였다. 이 기능은 뒤에 홍문관으로 이어졌다.
  • 의정부 서사제 –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 쓰시마섬 정벌 – 1419년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 4군 6진 –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 계해약조 – 3포 개항 이후 세종 25년(1443년)에 계해약조를 맺어 쓰시마 도주에게 세사미두 200석, 세견선 50척으로 허용해 주었다.
  • 훈민정음 창제 –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1443년)하여 반포하였다(1446년).
  • 지도·지리지 – 세종 때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고,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신찬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다.
  • 삼강행실도 – 세종 때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 과학 – 천체 관측기구로 혼천의(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년)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 칠정산 – 세종 때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 갑인자 – 세종 때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 총편등록 – 세종 때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다.
  • 농사직설 – 세종 때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최초의 농서로서 중국의 농업 기술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농법을 정리하였다.
  • 의학 –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이전

  •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임진왜란 발발

  •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이순신과 수군

  •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 한산도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둠

의병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육군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하였으며,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물리쳤다(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훈련도감

  •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정유재란

  •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임진왜란의 영향

  •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광해군의
중립 외교
중립 외교

  • 명에 요청에 따라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파견.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를 명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였다.

인조 반정

  •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기타

  • 동의보감 편찬
  • 경기도에 대동법 시행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정묘호란

  •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병자호란

  •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북벌 운동

  •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나선 정벌

  •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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