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제7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48번 기출 해설

문제

48. 다음 대화에 나타난 사건 이후에 전개된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었다.

②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③ 사사오입의 논리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④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해체되었다.

⑤ 민의원, 참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국회가 탄생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79년 YH 무역 사건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은 유신 체체의 붕괴의 서막이었다.

이후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철폐와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면서 유신 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

 

①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었다.

이승만 정부의 6.25 이전 미국이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였고,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을 결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YH 무역 사건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사사오입의 논리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1954년 개헌 당시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는 내용의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표결 결과 1표가 부족하여 부결되었으나, 자유당의 사사오입이라는 변칙적인 논리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를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한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해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9월, 제헌 국회에서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친일파 처벌보다 반공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민특위 소속 국회 의원들 중 일부가 공산당과 접촉하였다는 구실로 구속되었다(국회 프락치 사건).

결국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해체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민의원, 참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국회가 탄생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허정을 중심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다.

이후 제3차 개헌으로 양원제 국회(참의원, 민의원)와 내각 책임제를 중심으로 하는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유신 체제의
성립

  • 배경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냉전 체제가 완화되면서 국제적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미국은 주한 미군 병력의 감축을 결정하였다.

이에 반공을 강조하던 박정희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대북 정책이 수정되었고, 1972년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 10월 유신 선포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남북 통일을 위한 사회 질서 안정을 명분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비상 국무 회의에서 만들어진 유신 헌법은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로 확정되었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 유신 헌법(제7차 개헌) 내용
    • 임기

<유신 헌법>에서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연임 제한도 없었다.

 

    •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통령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간선 선거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 긴급 조치권 등

대통령에게 긴급 조치권을 부여하여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법률의 효력을 중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1/3 추천권, 국회 해산권, 법관 인사권을 주어 삼권 분립이 무력화되었다.

 

    • 기출 자료

 

  • 유신 체제의 성격

유신 체제는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였다.

 

  •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

재야 인사, 학생 종교인 등을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은 권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헌 청원 100만 명 서명 운동(1973년), 3·1 민주 구국 선언(1976년) 등을 통해 <유신 헌법> 폐지와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 유신 체제의 붕괴
    • 제2차 석유 파동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 YH 무역 사건

1979년 YH 무역 노동자들이 부당한 공장 폐쇄에 맞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강제로 진압하였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였다.

 

    • 부마 민주 항쟁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는 유신 철폐와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 10·26 사태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면서 유신 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

6⋅25 전쟁
  • 배경
    • 미국·소련 군대 철수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 38도선 무력 충돌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 중국의 공산화 및 중·소의 북한 지원

1949년 10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공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중국은 물론 소련에서도 군사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 6⋅25 전쟁 전개
    •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 유엔군의 참전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1950년 11월 1일, 국군∙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최대로 북진하였다.

 

    • 중공군 참전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 1·4후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전세는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 정전 협정
      • 소련의 정전 제안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국제 연합(UN)에 정전을 제안하였다.

 

      • 정전 회담 쟁점

정전 회담의 주요 쟁점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했다.

 

      • 반공 포로 석방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2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정전 회담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미국, 북한, 중국이다.

휴전협정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년).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사사오입 개헌

  • 배경

1952년 제2대 대통령이 당선된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발췌 개헌에 이어 또다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1954년 개헌 당시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 사사오입 개헌

표결 결과 1표가 부족하여 부결되었으나, 자유당의 사사오입이라는 변칙적인 논리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를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한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사사오입

국회에서 개헌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재적 의원 203명 중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실제 투표에서는 135명이 찬성하여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135.33…에 수학 통계에서 사용하는 사사오입(반올림)을 적용하여 136명이 아닌 135명만 찬성해도 된다고 주장하며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 내용
제55조 제1항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

부칙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부칙을 추가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기존의 제55조 제1항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됐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미군정은 조선 총독부 출신 관료와 경찰들을 활용하면서 친일파 처단을 외면하였다.

1948년 9월, 제헌 국회에서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이 법을 근거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 재판부가 조직되었다.

 

  • 내용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고, 재산 몰수 등의 내용이 담겼다.

 

  • 방해

친일파 처벌보다 반공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민특위 소속 국회 의원들 중 일부가 공산당과 접촉하였다는 구실로 구속되었다(국회 프락치 사건).

또한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혐의로 고위급 경찰이 체포되자 일부 경찰이 반민 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반민특위 습격 사건).

그리고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개정되어 친일파 처벌 기한이 줄어들었다(공소시효 단축).

 

  • 결과

반민특위는 활동을 개시한 지 몇 갱월도 채 되지 않아 해체되었으며, 682건의 친일 행위를 조사하는 데에 그쳤다.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자는 이광수, 최남수, 최린 등 12명에 불과하였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은 감형되거나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4·19 혁명
  • 배경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미국의 경제 원조 감축에 따른 경기 침체 등으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 제4·5대 정·부통령 선거

1960년대 제4·5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내세웠다.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시되었으나, 당시 80세가 넘은 이승만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므로, 부통령 선거가 큰 관심을 받았다.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 선거를 준비하였다.

 

  • 3·15 부정선거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과정에서 대대정인 부정을 저질렀다.

시민들은 부정 선거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선거 당일에 마산, 광주, 서울 등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열었다.

 

  • 김주열 열사

1960년 4월 11일,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시위는 격화되었다.

 

  •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부정 선거와 독재 정치를 규탄하며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 비상계엄 선포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자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 대학교수 시국 선언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도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하였다.

 

  • 이승만 하야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라고 발표한 뒤, 대통령직에서 하야를 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 허정 과도 정부 수립

4·19 혁명 이후 허정을 중심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다.

 

  • 제3차 개헌

양원제 국회(참의원, 민의원)와 내각 책임제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였다.

 

  • 의의

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후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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