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신라 왕별 업적 (진흥왕, 법흥왕) – 기출 요약

신라

신라의 성립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되었다(기원전 57년).

 

박·석·김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다.

 

신라 내물왕(4세기)

김씨 왕위 계승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마립간

왕의 칭호가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가야·왜 침입 격퇴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무르기도 하였다(400년).

이때,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다.

 

신라 눌지왕

나·제 동맹

눌지왕은 고구려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433년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 소지왕

나·제 동맹 강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응하기 위하여 소지왕은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녀가 결혼하는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추가적인 남진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신라 지증왕

국호

국호를 신라로 바꾸었다.

 

왕의 칭호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우산국 복속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512년).

 

신라 법흥왕

통치 질서 확립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불교 공인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했다.

 

골품 제도 정비와 상대등

법흥왕은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진골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두어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연호

법흥왕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금관가야 정복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17관등제

법흥왕 때에 각 부의 하급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7관등제를 완비하였다.

 

신라 진흥왕(6세기 중반)

삼국 간 항쟁 주도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화랑도 개편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했다.

 

영토 확장과 중국 교역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대가야 정복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역사서 편찬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황룡사 건립

진흥왕은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었다.

 

단양 적성비와 진흥왕 순수비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북한산비)를 세웠다.

 

자주 의식과 연호

진흥왕은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다.

 

신라 진평왕

걸사표

원광(圓光)법사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보냈다.

 

선덕 여왕

황룡사 9층 목탑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첨성대

첨성대를 세워 천체를 관측하였다.

 

신라 진덕 여왕

집사부

왕의 직속 기관인 집사부가 설치되었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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