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광해군의 중립 외교 – 기출 요약

광해군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인 공빈 김씨의 소생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1608년에 선조가 병으로 죽자, 왕위를 물려 받았다. 서자로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과 관련하여 붕당 정치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결국 서인에 의해 쫓겨났다.

 

전란 수습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일으켰다.

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을 되살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중립 외교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였고,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를 명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였다.

 

인조 반정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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