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포 왜란과 을묘왜변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같은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였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을묘왜변
3포를 개항한 이후 왜인들은 약조를 지키지 않고 자주 소란을 피웠다. 특히, 1555년(명종 10)에는 왜인이 70여 척의 배를 몰고 전라남도 연안 지방을 습격해 왔다.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일시 단절되었다. |
임진왜란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 왔다(1592년).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이순신과 수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
로써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의병
육지에서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향토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하면서 그에 알맞은 전술을 구사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의병
농민이 주축을 이루고, 전직관리와 사림 양반, 그리고 승려가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상당수가 관군으로 편입되었다. |
전쟁의 장기화와 대비
수군과 의병의 승전으로 조선은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하였으며, 관군과 백성이 합심하여 행주산성 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행주 대첩).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1597년).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다시 후퇴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임진왜란의 영향
임진왜란은 국내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
국내적으로는 왜군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도 부족해졌다.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본에 잡혀간 도자기 기술자
이삼평을 비롯한 도자기 기술자들은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
명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관련 문서
- 조선 임진왜란 관련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 모음
- 조선 임진왜란 관련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출 모음
- 조선 임진왜란 관련 공무원 시험 기출 모음
- 한국사 이론 – 조선 전기
- 한국사 이론 전체
- 조선 전기 역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