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세도 정치의 전개
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것을 세도 정치라고 한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 헌종 ,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세도 가문
안동 김씨 –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김조순이 왕의 장인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안동 김씨는 철종 때에도 세도를 누렸다. 풍양 조씨 – 헌종 이 8세로 즉위하자, 왕의 외조부인 조만영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
순조
수렴 청정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 때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훈련도감 정상화
이들은 신유박해를 이용하여 정조가 규장각을 통하여 양성한 인물들을 몰아냈고, 장용영을 혁파하고 훈련도감을 정상화시켜 이를 장악하였다.
안동 김씨
정순 왕후가 죽고 벽파 세력이 퇴조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김조순은 반남 박씨와 풍양 조씨 등 일부 유력 가문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효명 세자의 견제 실패
순조 말년에는 효명 세자가 대리청정을 통하여 세도가들을 견제하고 권력 집단을 결집하려 했으나 갑자가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헌종
헌종이 즉위하면서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가문이 득세하였다.
철종
철종 때에 이르러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결국 안동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는 흥선 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세도 정치기의 권력 구조
권력 구조에서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아래의 관리는 언론 활동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 맡게 되었다.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세도 정치의 폐단
19세기의 세도 정권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능력도 지니지 못하였다.
세도 정권은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 세력인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향촌에서는 지방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권을 가지고 조세를 거두도록 하였다.
세도 정치기에는 관직이 매매되는 등 비리가 만연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매관 매직의 실태
세도 정치하에서는 정치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고, 관리의 기강이 무너지면서 관직을 사고 파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감사 자리는 보통 5만~6만 냥, 수령 자리는 2만~3만 냥 정도에 거래되었다. |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관련 문서
- 조선 후기 세도 정치 관련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 모음
- 조선 후기 세도 정치 관련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출 모음
- 조선 후기 세도 정치 관련 공무원 시험 기출 모음
- 한국사 이론 –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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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역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