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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의 경제 정책
수취 제도
조세: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촌락 문서
촌락의 토지 크기, 남녀별·연령별의 정확한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토산물 등을 파악하는 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었으며,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문서를 다시 작성하였다.
토지 제도
녹읍과 식읍
통일 후, 신라는 귀족과 공신에게는 식읍 또는 녹읍을 주었다.
신라의 귀족들은 녹읍을 소유하고, 그 곳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며,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하였다.
관료전
국가는 이러한 귀족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관리에게 관료전이라는 토지를 주는 한편, 귀속들의 녹읍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에게도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국가에 조를 바치게 하였다.
녹읍 부활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제가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 토지가 날로 증가하여 국가 경제가 위태롭게 되었다.
정전 지급
성덕왕 때는 백성에게 정전을 주어 생활을 안정시켰다.
구휼 정책 강화
백성들을 위한 구휼 정책을 강화했다.
통일 신라의 경제 활동
서시, 남시 설치
상품 생산이 늘어나 이전에 설치된 동시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였다.
이슬람 상인
국제 무역이 발달하면서 이슬람 상인이 울산에까지 와서 무역하였다.
장보고의 청해진
8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무역 활동이 활발해져,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신라방
무역 확대로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에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인을 다스리는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만들어 졌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관련 문서
- 통일 신라 경제 관련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 모음
- 통일 신라 경제 관련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출 모음
- 통일 신라 경제 관련 공무원 시험 기출 모음
- 한국사 이론 – 남북국 시대
- 한국사 이론 전체
- 남북국 시대 역사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