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제7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9번 기출 해설

문제

9. 밑줄 그은 ‘나’에 해당하는 인물로 옳은 것은? [2점]

① 의상

② 원효

③ 원광

④ 유정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통일 신라 의상 대사에 대한 내용이다.

 

① 의상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통일 신라로 돌아왔다.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고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다.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 창건하여 화엄종을 널리 펼쳤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② 원효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펼쳤다.

‘십문화쟁론’을 저술했다.

화쟁 사상을 주장했다.

대승기신론소를 저술했다.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직접 전도했다.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원광

신라 진평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보냈다.

화랑도를 이끌면서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유정

사명대사.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7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①번이다.

 

통일 신라
불교
원효
  •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
  •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
  • ‘십문화쟁론’
  • 화쟁 사상 주장
  • 대승기신론소 저술
  •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
  •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
의상
  • 당나라에서 유학
  •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
  •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 경북 영주의 부석사 창건 후 화엄종을 널리 펼침
혜초
  • 자신이 돌아본 인도와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신라
진평왕
  • 원광법사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보냈다.
신라
사회 모습
  • 화백회의 –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가 함께 모여 정치를 운영
  • 골품 제도 –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졌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자료: 국사 편찬 위원회
  • 화랑도 – 진흥왕 때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원광은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임진왜란 배경

  •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임진왜란

  •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이순신과 수군

  •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 한산도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둠

의병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육군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하였으며,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물리쳤다(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훈련도감

  •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정유재란

  •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임진왜란의 영향

  •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조선 후기
일본과의 관계
일본의 국교 요청 –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조선인 포로 송환 –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7년).

기유약조 – 조선은 동래부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년).

통신사 파견 –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에는 400~500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을릉도와 독도 –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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