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T 기출] 2013 5급 언어논리 인책형 21번 해설 –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개요

다음은 2013년 국가공무원 5급 언어논리영역 인책형 21번 문제 해설이다.

문제

문 21. 다음 글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갑은 고려 전기까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무신 정권기에서 고려 말까지를 과도기로, 조선 시대부터는 중세 봉건제 사회로 본다. 갑은 고려 전기 국가 수취의 준거를 토지가 아닌 노동력에 둔다. 고대의 수취는 신라 장적문서에서 보이듯, 호의 등급이 토지가 아니라 정남(丁男)의 노동력으로 구분되었고 이러한 특징은 고려 전기까지도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신라, 고려 때에도 토지에 대하여 부과하는 조세가 없지는 않았지만 수취의 중점은 노동력 수탈과 인신 예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갑은 이러한 고대적 요소는 무신란 이후 점차 해체·극복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중세 봉건제 사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편 을은 고려의 성립을 중세 봉건제 사회의 출발로 본다. 을은 시대 구분의 기준을 경제적 측면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적 혈연관계에 기반한 골품제가 사회생활 전반을 제약하던 신라 사회는 하대(下代)에 들어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족 세력이 등장하여 나말·후삼국의 혼란기가 나타났지만 그것은 곧 고대 사회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건국에 성공한 태조 왕건이 노비를 풀어준다든가 백성들의 수취에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며 인신 예속의 약화를 표방한 것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 원리의 형성이 곧 중세 봉건제 사회의 성립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병은 삼국 시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삼국 항쟁기를 전환기로 보고 통일신라 이후를 중세 봉건제 사회로 구분하였다. 그는 사회경제사적 입장에서 토지 소유자와 직접 생산자 간 생산 관계의 특질을 시대 구분의 중심으로 삼았다. 고대 사회를 대토지 소유자인 귀족층과 직접 생산자인 하호층·노예 사이에 인신 예속을 기초로 한 생산 관계가 전개된 노예제 사회로, 중세 사회를 토지소유자인 지주와 경작자인 전호 사이의 생산관계와 신분제가 결합된 봉건제 사회로 보았다. 특히 순장을 강력한 인신 예속의 지표로 보고 삼국 말기 순장의 소멸을 중세 사회가 성립되는 주요 계기로 파악하였다.

① 중세 봉건제 사회 성립을 가장 이른 시기로 설정한 사람은 병이다.

② 갑, 을, 병은 모두 시대 구분 문제에서 경제적 측면을 고려하고 있다.

③ 시대 구분의 기준을 가장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하고 있는 사람은 을이다.

④ 갑, 을과 달리 병은 인신 예속이 강할수록 고대적 요소가 강하다고 하였다.

⑤ 갑, 을, 병은 모두 삼국 시대가 중세 봉건제 사회에 진입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출처: 사이버국가고시센터

문제 해설

① 중세 봉건제 사회 성립을 가장 이른 시기로 설정한 사람은 병이다.

갑은 고려 전기까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무신 정권기에서 고려 말까지를 과도기로, 조선 시대부터는 중세 봉건제 사회로 본다. 

한편 을은 고려의 성립을 중세 봉건제 사회의 출발로 본다. 봉건제 사회의 성립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병은 삼국 시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삼국 항쟁기를 전환기로 보고 통일신라 이후를 중세 봉건제 사회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② 갑, 을, 병은 모두 시대 구분 문제에서 경제적 측면을 고려하고 있다.

갑은 고려 전기까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무신 정권기에서 고려 말까지를 과도기로, 조선 시대부터는 중세 봉건제 사회로 본다. 갑은 고려 전기 국가 수취의 준거를 토지가 아닌 노동력에 둔다. 고대의 수취는 신라 장적문서에서 보이듯, 호의 등급이 토지가 아니라 정남(丁男)의 노동력으로 구분되었고 이러한 특징은 고려 전기까지도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신라, 고려 때에도 토지에 대하여 부과하는 조세가 없지는 않았지만 수취의 중점은 노동력 수탈과 인신 예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갑은 이러한 고대적 요소는 무신란 이후 점차 해체·극복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중세 봉건제 사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편 을은 고려의 성립을 중세 봉건제 사회의 출발로 본다. 을은 시대 구분의 기준을 경제적 측면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병은 삼국 시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삼국 항쟁기를 전환기로 보고 통일신라 이후를 중세 봉건제 사회로 구분하였다. 그는 사회경제사적 입장에서 토지 소유자와 직접 생산자 간 생산 관계의 특질을 시대 구분의 중심으로 삼았다. 

갑은 수취 준거에 따라 시대 구분을 하였다. 수취 준거가 노동력이라면 고대 노예제 사회, 토지라면 중세 봉건제 사회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시대 구분의 기준을 가장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하고 있는 사람은 을이다.

을은 시대 구분의 기준을 경제적 측면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갑, 을과 달리 병은 인신 예속이 강할수록 고대적 요소가 강하다고 하였다.

갑은 고려 전기까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무신 정권기에서 고려 말까지를 과도기로, 조선 시대부터는 중세 봉건제 사회로 본다. 물론 신라, 고려 때에도 토지에 대하여 부과하는 조세가 없지는 않았지만 수취의 중점은 노동력 수탈과 인신 예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갑은 이러한 고대적 요소는 무신란 이후 점차 해체·극복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중세 봉건제 사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편 을은 고려의 성립을 중세 봉건제 사회의 출발로 본다. 을은 시대 구분의 기준을 경제적 측면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적 혈연관계에 기반한 골품제가 사회생활 전반을 제약하던 신라 사회는 하대(下代)에 들어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족 세력이 등장하여 나말·후삼국의 혼란기가 나타났지만 그것은 곧 고대 사회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건국에 성공한 태조 왕건이 노비를 풀어준다든가 백성들의 수취에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며 인신 예속의 약화를 표방한 것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 원리의 형성이 곧 중세 봉건제 사회의 성립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병은 삼국 시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삼국 항쟁기를 전환기로 보고 통일신라 이후를 중세 봉건제 사회로 구분하였다. 고대 사회를 대토지 소유자인 귀족층과 직접 생산자인 하호층·노예 사이에 인신 예속을 기초로 한 생산 관계가 전개된 노예제 사회로, 중세 사회를 토지소유자인 지주와 경작자인 전호 사이의 생산관계와 신분제가 결합된 봉건제 사회로 보았다. 특히 순장을 강력한 인신 예속의 지표로 보고 삼국 말기 순장의 소멸을 중세 사회가 성립되는 주요 계기로 파악하였다.

갑, 을, 병 모두 인신 예속이 강할수록 고대적 요소가 강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갑, 을, 병은 모두 삼국 시대가 중세 봉건제 사회에 진입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갑은 고려 전기까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한편 을은 고려의 성립을 중세 봉건제 사회의 출발로 본다.

마지막으로 병은 삼국 시대를 고대 노예제 사회로, 삼국 항쟁기를 전환기로 보고 통일신라 이후를 중세 봉건제 사회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④번이다.

2013 5급 PSAT 언어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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