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고려의 몽골과의 전쟁 – 기출 요약

몽골과의 접촉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 금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이 몽골이 금에 침입해 온 것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몽골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해 왔다.

고려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서경 부근의 강동성에서 이들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몽골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후 몽골은 고려에 많은 물자를 요구하였다.

 

몽골과의 전쟁

그러나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이로부터 고려는 40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1231~1270년).

 

몽골의 1차 침입

고려와 몽골은 한동안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나, 결국 몽골의 침입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1231년).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당시 고려는 백성들과 관군이 하나가 되어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켰다.

 

박서

1231년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골 장수 살리타가 귀주를 공격하자, 한 달 동안의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몽골의 2차 침입

몽골군이 다시 침입했을 때(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이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몽골의 지속된 침입

몽골은 금을 정복한 후, 남송과 고려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서 여러 차례 고려에 침입하였다.

 

피해

이때 고려는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팔만대장경 조판

최씨 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16년간의 대역사 끝에 완성되었다. 팔만대장경판은 대몽 항쟁의 산물이며, 우리가 자랑하는 문화 유산의 하나이다.

 

팔만대장경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을 8만여 장의 나무판에 새겨 넣어서 팔만대장경판이라 한다.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에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와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개경 환도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났다.

몽골에 대한 항전을 주도해 온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몽골과 강화가 이루어졌다.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1270년).

 

삼별초의 항쟁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싸웠다.

이와 같은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이로써 40여 년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은 끝났다.

 

삼별초

최우가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일컫는다.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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