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10세기 초에 통일된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지만, 고려가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거란은 고려를 침입하였다.
거란의 1차 친입
993년(고려 성종), 거란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강동 6주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다. |
거란의 2차 친입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다.
1010년(고려 현종), 거란의 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이 함락되기도 하였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강조의 정변
1009년(목종 12)에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정변으로, 거란의 제2차 침입의 원인이 되었다. |
거란의 3차 친입
1018년(고려 현종),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
이때,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1019년).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고려는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관련 문서
- 고려 거란의 침입 관련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 모음
- 고려 거란의 침입 관련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출 모음
- 고려 거란의 침입 관련 공무원 시험 기출 모음
- 한국사 이론 – 고려 시대
- 한국사 이론 전체
- 고려 시대 역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