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국외 이주 동포의 활동과 시련 – 기출 요약

만주 이주 동포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확고한 민족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많이 건너갔다.

이들은 수많은 민족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일 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후에 일본군 대부대가 만주로 출병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초토화하면서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 참변에 의해 많은 동포들이 피살되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지기도 했다.

 

만보산 사건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이다.

 

일본 이주 동포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년 2월 8일).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고 나서 일본인들이 6천 명이 넘는 동포들을 학살하였다.

1938년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킨 후 강제 동원으로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이 늘어었다.

 

연해주 이주 동포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37년에는 연해주의 한인들이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고 재산을 잃어버렸다.

 

미주 이주 동포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10년에는 통합 단체인 대한인 국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 조야에 일제의 야만성을 폭로,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4년 박용만은 하와이로 거점을 옮겨 대조선 국민 군단과 대조선 국민 군단 사관학교을 창립하였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교과서(금성출판사, 비상교육, 동아출판, 해냄에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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