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사상의 형성
일찍이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표면화된 통상 개화론은 문호 개방을 전후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론, 곧 개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개화 사상은 안으로는 실학, 특히 북학파의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밖으로는 청에서 진행되고 있던 양무 운동과 일본에서 제기되고 있던 메이지 유신(문명 개화론)의 영향을 받은 사상이었다.
개화파의 형성
개화 사상의 선각자인 박규수의 지도를 받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김윤식, 유길준 등 개화 주장자들이 점차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개화파를 이루었다.
개화파는 1880년대에 들어, 정계에 진출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고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개화파의 분화
그런데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개화 정책의 추진 방법과 외교의 방향을 놓고 개화파 안에 입장 차이가 커졌다.
이들은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분화되었다.
온건 개화파(사대당, 수구당)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은 민씨 정권과 결탁하여 청의 양무 운동을 본받아 유교 질서를 지키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는데, 이들을 온건 개화파라고 한다.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동도]은 지키면서 서구의 근대 기술[서기]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다. |
급진 개화파(개화당, 독립당)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소장파 관료들은 청의 간섭을 물리쳐 자주 독립을 확립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문명 개화론)을 본받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들은 청의 내정 간섭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명 개화론
서양의 사상, 문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
개화파의 흐름과 분류
북학파 실학자 | |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 |
↓ | |
통상 개화론 | |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 |
↓ | |
1876년 개항 | |
↓ | |
개화파 | |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 |
↓ | |
임오군란 및 청의 내정 간섭 | |
↓ | |
↓ | ↓ |
온건 개화파 (동도서기론) |
급진 개화파 (문명개화론) |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교과서(금성출판사, 비상교육)
관련 문서
-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 관련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 모음
-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 관련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출 모음
-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 관련 공무원 시험 기출 모음
- 한국사 이론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 한국사 이론 전체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