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포 왜란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이 일어났다.
기묘사화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청렴함과 원리 원칙에 충실한 태도는 남곤⋅심정 등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조광조의 개혁 정치
조광조는 추천에 의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고, 도덕을 중요시하는 정치를 펴고자 하였다. |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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