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조선 후기 영조의 탕평 정치 – 기출 요약

탕평의 교서

영조는 즉위 직후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어지로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자신이 노론과 소론을 번걸아 등용하여 오히려 정국을 더욱 어지럽게 하였다.

 

탕평(蕩平)의 의미

탕평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탕평파 중용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붕당을 만드는 자는 영원히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고, 노론의 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막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몰아 내고 소론과 남인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펼쳐 나갔다.

 

탕평비 설치

영조는 탕평책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한양의 성균관에 붕당간의 다툼을 금하는 탕평비를 세웠다.

 

산림 존재 불인정

영조는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이조 전랑 권한 약화

영조는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1741년).

 

균역법 시행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다(1750년).

 

편찬

영조는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정리하였다.

또한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한계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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