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T 기출] 2012 5급 언어논리 인책형 19번 20번 해설 – 진리 정합론 명제 추론

개요

다음은 2012년 국가공무원 5급 언어논리영역 인책형 19번, 20번 문제 해설이다.

문제

※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문 19~문 20]

진리 정합론에 따르면,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은 그 명제가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와 정합적이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어떤 명제가 다른 명제와 정합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진리 정합론자 X는 ‘정합성’ 개념을 ‘논리적 일관성’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논리적 일관성’이란 무엇인가? 다음 두 명제를 생각해보자.

(가) 숭례문은 서울에 있다.

(나) 서울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도이다.

이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있을까? 즉, 둘 모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두 명제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우리는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명제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다르게 말하여, 논리적 일관성이란 모두가 참이라고 해도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무모순성이라고도 한다. 이제 위의 두 명제에 명제 하나를 더하여 세 명제를 함께 생각해보자.

(다) 서울이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도라면, 숭례문은 서울에 없다.

이렇게 구성된 세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 없다. 우리는 (가)~(다) 모두가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 명제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일관성으로 정합성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어떤 명제들의 집합 A가 있다고 할 때,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만 서로 동시에 참일 수 없는 두 명제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와 (나)만을 원소로 갖는 집합을 A라 하자. 이 때, 두 명제 “영이는 석이를 사랑한다.”와 “영이는 석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모두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그렇다면 집합 A의 명제들만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이가 석이를 사랑한다.”는 것도 정합적이어서 참이고 “영이가 석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정합적이어서 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진리 정합론자 Y는 ‘정합성’이라는 개념을 ‘논리적 함축’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가)와 (나)만을 원소로 갖는 집합 A가 어떤 명제 p를 논리적으로 함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A가 참인 경우에 p가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두 명제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라) 부산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다.

(마) 철수는 행정안전부의 사무관이다.

(라)와 (마)는 모두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명제들이다. 그러나 A는 (라)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만, (마)는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A의 (나)가 참일 경우 (라)는 반드시 참이지만, A의 명제들이 모두 참이라 할지라도 (마)가 반드시 참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A의 명제들만 믿는 사람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는 (라)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합성을 설명하는 진리 정합론도 문제가 있다. 진리, 즉 참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합성이라는 개념을 이용하고, 정합성의 개념을 논리적 함축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그런 다음, 논리적 함축을 “한 명제가 참이라면 다른 명제도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진리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진리 개념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정합성을 논리적 함축이라고 설명하는 진리 정합론은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문 19. 위 글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보 기>
ㄱ. 두 명제 p와 q가 동시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면, p와 q는 모순이 아니다.

ㄴ. 두 명제 p와 q가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라면, p가 q를 논리적으로 함축하거나 q가 p를 논리적으로 함축한다.

ㄷ. 논리적으로 일관된 어떤 명제들의 집합 K가 어떤 명제 p를 논리적으로 함축하면, K와 p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① ㄱ

② ㄱ, ㄴ

③ ㄱ, ㄷ

④ ㄴ, ㄷ

⑤ ㄱ, ㄴ, ㄷ

 

문 20. 위 글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① X는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함축되지 않는 명제는 반드시 거짓이라고 할 것이다.

② Y는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함축되는 명제라도 거짓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③ X의 입장보다 Y의 입장이 더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④ X는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명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지만, Y는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⑤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가 (가)와 (나)만일 경우, Y가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명제는 X 역시 참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출처: 사이버국가고시센터

19번 문제 해설

ㄱ. 두 명제 p와 q가 동시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면, p와 q는 모순이 아니다.

(가) 숭례문은 서울에 있다.

(나) 서울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도이다.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있을까? 즉, 둘 모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두 명제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우리는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명제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다르게 말하여, 논리적 일관성이란 모두가 참이라고 해도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무모순성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ㄴ. 두 명제 p와 q가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라면, p가 q를 논리적으로 함축하거나 q가 p를 논리적으로 함축한다.

(가) 숭례문은 서울에 있다.

(나) 서울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도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진리 정합론자 Y는 ‘정합성’이라는 개념을 ‘논리적 함축’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가)와 (나)만을 원소로 갖는 집합 A가 어떤 명제 p를 논리적으로 함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A가 참인 경우에 p가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두 명제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라) 부산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다.

(마) 철수는 행정안전부의 사무관이다.

(라)와 (마)는 모두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명제들이다. 그러나 A는 (라)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만, (마)는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A의 (나)가 참일 경우 (라)는 반드시 참이지만, A의 명제들이 모두 참이라 할지라도 (마)가 반드시 참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A의 명제들만 믿는 사람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는 (라)뿐이다.

A
(가) 숭례문은 서울에 있다.

(나) 서울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도이다.

(마) 철수는 행정안전부의 사무관이다.

(마)는 A의 (가)와 (나)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명제이다.

하지만 A는 (마)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가)와 (나)가 참이라고 해도 (마)가 반드시 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ㄷ. 논리적으로 일관된 어떤 명제들의 집합 K가 어떤 명제 p를 논리적으로 함축하면, K와 p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가) 숭례문은 서울에 있다.

(나) 서울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도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진리 정합론자 Y는 ‘정합성’이라는 개념을 ‘논리적 함축’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가)와 (나)만을 원소로 갖는 집합 A가 어떤 명제 p를 논리적으로 함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A가 참인 경우에 p가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두 명제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라) 부산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다.

(마) 철수는 행정안전부의 사무관이다.

(라)와 (마)는 모두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명제들이다. 그러나 A는 (라)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만, (마)는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따라서 A의 명제들만 믿는 사람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는 (라)뿐이다.

논리적으로 일관된 명제 (가)와 (나)의 집합 A가 명제 (라)를 논리적으로 함축하면, A와 (라)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③번이다.

20번 문제 해설

① X는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함축되지 않는 명제는 반드시 거짓이라고 할 것이다.

‘정합성’이라는 개념을 ‘논리적 함축’으로 설명하는 것은 X가 아니라 Y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Y는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함축되는 명제라도 거짓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라) 부산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다.

(마) 철수는 행정안전부의 사무관이다.

(라)와 (마)는 모두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명제들이다. 그러나 A는 (라)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만, (마)는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A의 (나)가 참일 경우 (라)는 반드시 참이지만, A의 명제들이 모두 참이라 할지라도 (마)가 반드시 참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A의 명제들만 믿는 사람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는 (라)뿐이다.

Y는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함축되는 명제는 반드시 참이라고 할 것이고, 논리적으로 함축되지 않는 명제는 거짓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X의 입장보다 Y의 입장이 더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일관성으로 정합성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어떤 명제들의 집합 A가 있다고 할 때,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만 서로 동시에 참일 수 없는 두 명제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와 (나)만을 원소로 갖는 집합을 A라 하자. 이 때, 두 명제 “영이는 석이를 사랑한다.”와 “영이는 석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모두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그렇다면 집합 A의 명제들만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이가 석이를 사랑한다.”는 것도 정합적이어서 참이고 “영이가 석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정합적이어서 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합성을 설명하는 진리 정합론도 문제가 있다. 진리, 즉 참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합성이라는 개념을 이용하고, 정합성의 개념을 논리적 함축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그런 다음, 논리적 함축을 “한 명제가 참이라면 다른 명제도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진리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진리 개념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정합성을 논리적 함축이라고 설명하는 진리 정합론은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X의 입장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만 서로 동시에 참일 수 없는 두 명제를 인정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다.

Y의 입장에 따르면 정합성을 논리적 함축이라고 설명하는 진리 정합론이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이 더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위 글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X는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명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지만, Y는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진리 정합론자 Y는 ‘정합성’이라는 개념을 ‘논리적 함축’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가)와 (나)만을 원소로 갖는 집합 A가 어떤 명제 p를 논리적으로 함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A가 참인 경우에 p가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두 명제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라) 부산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다.

(마) 철수는 행정안전부의 사무관이다.

(라)와 (마)는 모두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명제들이다. 그러나 A는 (라)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만, (마)는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A의 (나)가 참일 경우 (라)는 반드시 참이지만, A의 명제들이 모두 참이라 할지라도 (마)가 반드시 참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A의 명제들만 믿는 사람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는 (라)뿐이다.

Y는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명제가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와 정합적이라는 진리 정합론을 이용한다.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 집합이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함축한다면, 그 명제는 반드시 참이 된다.

Y 역시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명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대다수의 사람이 참이라고 믿는 명제가 (가)와 (나)만일 경우, Y가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명제는 X 역시 참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가) 숭례문은 서울에 있다.

(나) 서울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도이다.

이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있을까? 즉, 둘 모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두 명제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우리는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명제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다. 다르게 말하여, 논리적 일관성이란 모두가 참이라고 해도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무모순성이라고도 한다. 이제 위의 두 명제에 명제 하나를 더하여 세 명제를 함께 생각해보자.

 

(라) 부산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다.

(마) 철수는 행정안전부의 사무관이다.

(라)와 (마)는 모두 A와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명제들이다. 그러나 A는 (라)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만, (마)는 논리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 A의 (나)가 참일 경우 (라)는 반드시 참이지만, A의 명제들이 모두 참이라 할지라도 (마)가 반드시 참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A의 명제들만 믿는 사람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는 (라)뿐이다.

(가) 숭례문은 서울에 있다.

(나) 서울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도이다.

(라) 부산은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다.

Y는 (가)와 (나)가 포함된 명제 집합 A가 (라)를 함축하기 때문에 (라)는 반드시 참이라고 받아들인다.

X 입장에서 (가), (나), (라) 모두 참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으며, 세 명제 모두 논리적으로 일관적이고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2012 5급 PSAT 언어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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