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기출] 도산 안창호 – 기출 요약

안창호

신민회

신민회는 1907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안창호, 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하였다.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미주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안창호 등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13년에는 안창호흥사단을 조직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1923년)

배경

192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발각되어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또한 임시 정부 내에서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외교 활동은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소집 요구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어 여러 민족 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결과

창조파 개조파 현상 유지파
인물 박용만, 신채호, 김규식 안창호, 이동휘, 여운형 김구, 이동녕
주장 임시 정부 해체,
임시 정부 대체할 새로운 조직,
상하이 이외 지역으로 임시 정부 이전
임시 정부 개선·보완,
실력 양성 우선,
임시 정부를 민족 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 개조
현상 유지

국민 대표 회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의 대립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안창호는 개조파에 속했다.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떠났다.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

1926년 중국 북경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창립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3부 통합 운동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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