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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계몽 운동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독립 협회 계열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국권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들은 사회 진화론을 받아들여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고, 신문과 잡지 등 언론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애국 계몽 운동이라 한다.
보안회(1904년)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헌정 연구회(1905년)
독립 협회에 영향을 받은 헌정 연구회는 국민의 정치 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대한 자강회(1906년)
대한 자강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1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의 양위를 강요하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대한 협회(1907년)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민권의 신장, 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대한 협회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신민회
조직
신민회는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목표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활동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태극 서관과 자기 회사
신민회는 평양과 서울에 설립된 태극 서관에서 계몽 서적을 출판하였다. 또한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워 민족 산업의 육성에도 힘썼다.
신흥 강습소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해산
신민회는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그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국채 보상 운동
경제적 구국 운동으로 국채 보상 운동도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언론 기관이 적극 참여하였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교과서(금성출판사, 비상교육)
관련 문서
- 애국 계몽 운동 관련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 모음
- 애국 계몽 운동 관련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출 모음
- 애국 계몽 운동 관련 공무원 시험 기출 모음
- 한국사 이론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 한국사 이론 전체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