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정치
국권 강탈 이후, 일제는 식민 통치의 중추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한민족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현역 대장이 조선 총독으로 임명되어 식민 통치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조선 총독은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자문 기구로 중추원을 두어 한국인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이는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한반도에는 일본군 2개 사단과 2만여 명의 헌병 경찰 및 헌병 보조원을 배치하여 강력한 헌병 경찰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 통치를 통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 지도자들은 체포, 투옥, 학살당하였다. 또, 일반 관리는 물론 학교 교원들에게까지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하였던 것은 위협적인 헌병 경찰 통치의 한 수단이었다.
일제는 헌병 경찰에게 사소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조선 태형령 1912년)에 처했다.
1910년대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일제는 제1차 조선 교육령을 발표하여 한국인의 교육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 중심으로 편성하여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였다. 또한 민족 교육을 강조하던 사립 학교를 탄압하였다.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규정하였다. 1918년 일제는 <서당 규칙>을 통해 서당 설립을 인가제(허가제)로 바꾸었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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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3⋅1 운동과 그로 인하여 악화된 국제 여론에 직면한 일제는 식민 통치 정책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일제의 문화 통치는 친일파를 길러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려는 정책으로서, 우리 민족의 단결을 억제하고 독립 운동을 막으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일제는 지금까지 현역 군인으로 조선 총독을 임명, 파견하던 것을 고쳐 문관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일제가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다.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다 하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 그리고 그 유지비는 3⋅1 운동 이전보다 크게 증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등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시켰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우리 민족의 신문 발행이 허가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언론에 대해서 검열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기사는 마음대로 삭제하였고, 더 나아가 신문의 정간을 다반사로 하였으며, 폐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는 제2차 조선 교육령(1922년 2월)을 통해 보통 학교의 교육 연한을 4년에서 6년, 고등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5년으로 연장하였다. 또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학교 수는 여전히 부족했고, 조선인의 취학률이 일본인보다 낮았다.
일제는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는 것처럼 부 면 합의회를 민선으로 구성하고 도 평의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의결권이 없는 자문 기구일 뿐이었고, 일본인이나 친일 인사로 구성되었다.
1925년 일제는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항일 민족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였다.
문화 통치에 동조한 일부 지식인들은 민족 개조론, 자치론, 참정권론 등을 주장하며 민족 운족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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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공황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제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하나로 묶는 경제 블록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노동력과 자원은 일제에게 보다 철저히 수탈당하였다. 그 후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만주사변), 더 나아가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강행하면서 한국을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그리고는 식민 정책을 강화하여 우리 민족을 더욱 탄압하였고, 모든 방면에 걸쳐 식민지 수탈 정책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 국왕에 대한 숭배 사상을 주입하는 민족 말살 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효율적으로 동원하려는 의도였다.
일제는 만주 점령 이후 만주를 농업 원료 지대로, 한국을 중화학 공업 지대로 설정하고 조선 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일본에 필요한 공업 제품의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면화의 재배와 면양의 사육을 시도하는, 이른바 남면 북양 정책을 수립하였다.
일제는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본격적으로 인력과 물자의 수탈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 정신을 뿌리뽑기 위해 이른바 일⋅선 동조론을 주장하였고,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창씨개명 1940년), 황국 신민 서사 암송(1937년),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941년 소학교의 명칭을 ‘황국 신민 학교’라는 뜻의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일제는 제3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 교육을 사실상 폐지(선택 과목)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했다.
1940년에는 한글을 사용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신문을 폐간하였다.
1930년대부터 일제는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행동은 물론이고 사상까지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시기, 중일전쟁 후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침략 전쟁에서 한국인의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 조선 연맹을 조직하였다. 연맹의 가장 하부에는 애국반을 조직하였고, 반상회를 통해 일본어 사용, 전쟁을 위한 애국 저금 등의 정책을 홍보하였다. 1940년 초 일제가 강점기 막바지에 여성의 노동력을 얻기 위해 몸뻬를 고안해 냈다. 1936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은 <치안 유지법> 위반자 중 집행 유예, 형 집행 종료 또는 가출옥한 사람을 대상으로 2년간 보호 관찰을 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었다. 1941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은 이에 더 나아가서 <치안 유지법>을 위반하여 형에 처해진 경력이 있는 자를 그 집행을 마치고 석방된 이후에도 필요한 경우 검경이 법원의 영장 없이도 자의적으로 계속하여 구금하거나 일정하게 제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반인권적 조치였다. |
일제강점기 민족 운동
|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평양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송죽회를 결성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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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
국권 피탈 이후 서간도로 이주한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등은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였고, 이곳에서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를 세웠다. 지치 기관인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서로 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이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북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은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고 간민회 등의 자치 단체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었다. 이상설, 김약연 등은 각각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종교는 북간도로 거점을 옮겼고, 서일 등 신자 중 일부가 무장 독립 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개편하였다.
이상설, 이승희 등은 북만주 밀산부에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권업회의 초대 회장은 최재형이었다.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외 한인 단체인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고, 이동휘 등이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1912년), 박달 학원(1913년) 등이 조직되었다. 1912년 7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은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조소앙은 1913년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중시했고, 중국의 각종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100여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5년 베이징에서는 신규식, 박은식 등이 신한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신규식, 조소앙 등이 국민 주권론과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05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에네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 생활을 하였다. 1910년에는 숭무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안창호 등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13년에는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해 한인 비행 학교를 설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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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이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제시했다.
1917년 7월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조소앙 등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주권론을 제기하며 새로운 임시정부 결성의 필요성을 제의・제창한 최초의 선언문이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는 국외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 39인이 무오 독립 선언서(대한 독립 선언)를 발표하여 일제에 대한 육탄 혈전을 결의하였다.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 2. 8.).
1919년 1월에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고,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 인사들은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하고,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최남선이 작성하고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3⋅1 독립 선언서(기미 독립 선언문)를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서울과 지방의 여러 도시에 몰래 배포하였다.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후, 거리에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서울, 평양, 원산, 의주 등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참여한 계층도 학생, 농민, 노동차, 상인, 교사 등 다양하였다. 3월 중순을 지나면서 만세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만세 시위는 점차 무력 저항 운동으로 바뀌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군청, 면사무소, 헌병 경찰 주재소 등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으며, 수탈에 가담한 일본인 지주 등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만세 시위는 국외로도 확산되었다. 간도와 연해주, 하와이 등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은 거의 어디에서나 일어났다.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국내의 3⋅1 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곧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보복성 학살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린 나이로 충청남도 천안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유관순은 구속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어, 일제는 폭력적인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민주공화제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가 높아지면서 무장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3⋅1 운동은 중국의 5⋅4 운동 등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자유 대회가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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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후 독립 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여러 지역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서는 대한 국민 의회가 조직되었다. 대통령 손병희,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서울에서는 13도 대표가 모여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 총리 이동휘 선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의정원 구성,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정부 통합 운동은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성사되었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를 계승하고, 대한 국민 의회를 흡수하여 상하이에 통합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년 9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를 통합한 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추대하였다. 헌정 체제를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으로 구성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로 출범하였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이었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의 지방 행정 기관으로 국내의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을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임시 정부 활동에는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였다. 임시 정부는 이 자금을 독립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으로 마련하였다. 국내외에서 수합된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또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임시 정부는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군무부 아래에는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총영 등을 두었으며, 이후 육군 주만 참의부(1924년)를 편성하여 무장 투쟁을 펼쳤다.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192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발각되어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또한 임시 정부 내에서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외교 활동은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어 여러 민족 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의 대립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떠났다.
1925년 임시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곧이어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바꾸고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이동녕과 김구 등을 중심으로 체제를 재정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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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패한 일제는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고(훈춘 사건),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였다.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시련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재정비하였다. 이들 3부는 한인 사회를 자치적으로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 등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압록강 연안 지역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남만주 지린성과 봉천성 일대를 담당했다.
북만주 지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1925년 일제와 만주 군벌은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다.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양세봉 등이 중심이 된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된 혁신 의회는 해체된 후,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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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의열단은 일제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5파괴, 7가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박재혁 – 1920년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 –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 – 1924년 일본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원들은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 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년)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 이후 침체를 겪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이때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요 장성과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한국 애국단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크게 호전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직되는 토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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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독립군은 보다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의 일부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한국광복군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신개령 전투, 통화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만주 일대에서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의 연결선상에서 김원봉, 조소앙, 지청천 등이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 혁명당 결성에는 김구를 제외한 한국 독립당(임시 정부 계열),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 혁명당, 대한독립당 등이 참여하였다.
1935년 민족 혁명당에 합류하지 않은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의열단의 김원봉의 전권 장악에 반발한 한국 독립당계(임시 정부 계열, 조소앙)와 신한 독립당계(지청천 또는 이청천)가 탈퇴한 후, 민족 혁명당은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개편됐다. 탈퇴한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임시 정부 계열)을 재건했다. 탈퇴한 지청천(또는 이청천)은 조선 혁명당을 재건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민족 혁명당은 다른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아래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가 김원봉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조선 의용대는 일본군의 정보 수집, 포로 신문, 후방 교란, 심리전 등을 수행하였다.
조선 의용대는 항일 투쟁에 대한 노선이 나뉘어져 분화되었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원하는 조선 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결성했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김원봉을 포함한 조선 의용대 본대 잔류 인원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 곳곳에 만들어진 항일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하였다(1933년).
이후 동북 인민 혁명군은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반일 세력을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1936년).
동북 항일 연군 내의 한 부대로 편성된 한인 유격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조국 광복회를 결성하였다(1936년). 1937년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 아래 함경도 보천보의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보천보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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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김구의 한국 국민당,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3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옹호,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7년 김원봉의 주도 하에 조선 민족 혁명당은 다른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는 두 세력의 합작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계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사회주의계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이견 차이로 인해 좌우익 세력의 통일 운동은 결렬되었다.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총사령관을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임시 정부의 정규군이 되었다.
1942년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았던 조선 의용대 일부가 중국 팔로군과 연합한 이후, 한국광복군은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에 근거해 중국 군사위원회의 간섭을 받았다. 1944년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이 폐기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 광복군의 지휘권을 가지면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식으로 일제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광복군은 미얀마·인도 전선에 참가하여,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포로 심문, 정보 수집, 선전 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작전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일찍 항복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1942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김두봉이 주도하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등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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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윤봉길 의거 이후 큰 활력을 얻었다. 그러나 더 강화된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상하이를 떠나야만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여러 차례 이동을 거듭한 끝에 충칭에 정착하였다.
1940년 김구의 한국 국민당,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3당은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1940년 임시 정부는 중국 충칭에 정착하여, 총사령관을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임시 정부는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1941년 임시 정부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여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강령에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정 수립, 토지와 대기업 국유화, 의무 교육 제도 시행, 노동권 보장 등의 내용이 담겼다.
1942년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은 조선 민족 전선 연맹(민족 혁명당 후신)의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식으로 일제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작전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일찍 항복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화북 지방으로 이동한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42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김두봉이 주도하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등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국내에서도 건국 준비 활동이 시작되었다. 1944년 여운형, 안재홍 등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조선 건국 동맹이 만들어졌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여운형은 독립 선언서를 준비하고, 무장 세력도 조직하면서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시도하였다. 조선 건국 동맹은 일제 타도를 위한 대동단결, 민주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카이로 회담에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참석하였다. 3국 대표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최초로 한국의 독립이 약속된 것이다.
1945년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얄타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1945년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독일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카이로 선언에서 결정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한다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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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력 양성 운동의 대두 |
3·1 운동 이후 일부 지식인들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했다.
실력 양성 운동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내세운 사회 진화론에 기반한 것으로, 이미 1900년대 애국 계몽 운동 당시 국권 회복의 방법으로 제기된 바 있었다. 실력 양성 운동은 크게 민족 기업 설립과 물산 장려 운동 등을 통한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문맹 퇴치 운동 등을 통한 교육·문화 운동으로 이루어졌다.
회사령 철폐 이후 경성 방직 주식회사,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등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실력 양성 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쉽게 무너지는 경향을 보였고, ‘선 실력 양성, 후 독립’을 내세웠지만 점차 실력 양성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한편, 실력 양성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광수, 최린, 김성수 등은 일제의 이른바 ‘문화 통치’에 기대를 걸면서 조선 총독부 아래에 자치 정부나 자치 의회를 만들게 해 달라는 자치 운동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민족주의 세력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에 이용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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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산 장려 운동 |
1920년 회사령 철폐 이후 경성 방직 주식회사,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등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동시에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가 철폐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인 자본가들의 위기 의식이 높아졌다. 1923년 일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를 폐지하여 일본 상품이 한국에서 더 싼값에 팔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민족 산업과 자본을 보호·육성하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 조만식, 이상재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고, 1923년 관세령 폐지 이후 서울에서도 조선 물산 장려회가 만들어지는 등 물산 장려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학생들은 자작회를, 부녀자들은 토산 애용 부인회를 만들어 물산 장려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은 ‘조선인이 만들 것을 입고, 먹고, 쓰자’, ‘조선 사람 조선 것’,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활발히 진행되었다.
물산 장려 운동은 기업의 생산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상품 가격만 올려놓는 경우가 많아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물산 장려 운동은 점차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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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1910년대 한국인 교육은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에 치중되었고,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인도 많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구가 높아졌고, 제2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만들어졌다(1922년 11월). 이를 바탕으로 출범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방해하고, 잇따른 자연재해로 모금 운동이 어려워지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교육하고 한국인의 교육열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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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맹 퇴치 운동 |
일제의 차별적인 교육 정책으로 한국인 중 상당수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한글을 보급하여 민중을 깨우치고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문맹 퇴치 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대에는 각지에 야학이 설립되었는데, 이들 야학은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여 가르치는 교과목도 조선어 중심이었다. 이에 일제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야학을 탄압하여 문을 닫게 하였다.
1929년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 아래 문자 보급 운동을 펼쳤다.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한글원본>이라는 한글 교재를 발간하여 농촌에 배부하였다.
1931년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브나로드’라는 구호 아래 학생이 참여하는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아는것이 힘, 배워야 산다.
조선어 학회는 강습회를 열고 한글 교재를 발행하는 등 한글 보급에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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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민족 지도자들의 독립 운동이 크게 제약을 받는 가운데 학생들은 강연, 연극, 야학, 농촌 계몽 활동 등을 통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 섰다. 또, 학생들은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고, 일본인 교사의 한국인 멸시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 공산당은 학생 단체, 천도교 일부 세력과 힘을 모아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인 6월 10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으나, 학생들은 일제 경찰의 감시를 뚫고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격문을 뿌리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기출 자료
학생 운동이 식민 통치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이 운동을 함께 준비하면서 민족 유일당(민족 협동 전선)을 만들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신간회 창립에 기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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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1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를 배경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1926년 중국 북경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창립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국내에서는 최린, 이광수 등이 자치 운동(자치론)을 전개하며 일제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이상재, 안재홍 등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였고, 나아가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여 민족 운동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1925년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대하고자 하였다.
치안 유지법으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신간회 설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최대 규모의 합법적인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신간회는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는 것을 기본 강령으로 내세웠다.
신간회 출범과 더불어 탄생한 것이 근우회였다. 근우회는 김활란 등이 중심이 되어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으로 조직되었고,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와 새생활 개선을 행동 강령으로 하였다. 근우회의 창립이념과 활동의 기본 방향은 강령에 제시된 “조선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이다.
신간회는 합법적인 공간을 활용하여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식민지 교육 반대, 타협적 정치 운동 반대 등을 주장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을 비판하였다.
신간회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다.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 계열과의 협동 전선 해체를 지시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신간회 해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1931년에 열린 전체 대회에서 신간회를 해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신간회의 결성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여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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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 운동을 계기로 학생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학생들은 독서회 등 각종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으며 동맹 휴학 등 저항 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한국인 중심 교육 제도 확립, 식민지 교육 및 한·일 학생 사이의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였다.
1929년 10월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여 발생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경찰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자, 광주 지역의 성진회와 각 학교 독서회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 학생 운동은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었으며, 12월에는 서울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학생들은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확립’, ‘식민지 교육 철폐’, ‘일본 제국주의 타도’, ‘민족 해방’을 주장하였으며, 1930년 3월까지 전국에서 시위와 동맹 휴학을 지속하였다.
신간회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으며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3·1 운동 이후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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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운동 |
소년 운동은 1921년 방정환을 중심으로 천도교 소년회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방정환은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하라는 의미에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아이에서 어린이로!
1922년 천도교 소년회의 방정환과 김기전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천도교 소년회는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발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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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운동 |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며 남녀평등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조선 여자 교육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를 만들어 여성 계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4년 조선 여성 동우회가 창립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을 주장하였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누어져 있던 여성 단체들은 1927년 신간회의 창립을 계기로 자매 단체인 근우회를 만들었다. 근우회의 창립이념과 활동의 기본 방향은 강령에 제시된 “조선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이었다. 근우회는 기관지인 <근우>를 발간하였다.
조선의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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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 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다. 학교 입학 통지서에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1923년 백정 출신들은 경상 남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더 나아가 조선 형평사는 다른 분야의 사회 운동 단체와 협력하면서 파업, 소작 쟁의 등에 참가하는 등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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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 운동 |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농민들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세금 등을 부담하였기 때문에 식량 부족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결국 많은 농민이 자작농에서 자소작농으로, 자소작농에서 토목 공사장이나 광산 노동자로 몰락하였다
1920년대 들면서 농민들은 생존권을 요구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3년 전라도 암태도에서 소작인들이 친일 지주 문재철의 횡포와 일본 경찰의 탄압에 맞서 암태도 소작 쟁의를 벌였다.
1927년 전국적인 농민 운동 단체인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되어 농민 운동의 규모와 조직이 한층 발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공황의 영향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비합법적이고 혁명적인 농민 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이 시기 농민 운동은 반제국주의 항일 운동의 모습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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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운동 |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가 점차 늘어났다. 동시에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이상은 하루 12시간이 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임금은 대부분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한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 등은 노동자의 계급 의식과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노동 운동을 벌이는 배경이 되었다.
1920년대에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임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노동 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더 나아가 노동자들은 지역별 직업별로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 단체에 참여하여 노동 조건과 민족 간 차별 대우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1923년 경성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하여 1924년에는 조선 노농 총동맹이 만들어졌다.
1927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조선 농민 총동맹과 조선 노동 총동맹으로 분리되었고, 조선 노동 총동맹은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각 지방의 노동 쟁의를 이끌면서 노동 운동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1929년 원산 라이징 선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일이 발단이 되어 원산 노동 연합회 주도로 4개월간의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파업은 전국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받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자도 격려 전문을 보내와 국제적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에 대륙 침략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군수 공업 시설을 확충하고, 지하 자원을 약탈하였으며,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일제는 한국 노동자의 임금을 더욱 인하하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였으며, 각종 부담금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1930년대 노동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비합법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노동 운동은 반제국주의 항일 운동의 성격을 보였다. 1931년 평원고무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강주룡은 을밀대에 올라 고공농성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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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외 이주 동포의 활동과 시련 |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확고한 민족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많이 건너갔다. 이들은 수많은 민족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일 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후에 일본군 대부대가 만주로 출병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초토화하면서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 참변에 의해 많은 동포들이 피살되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지기도 했다.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이다.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년 2월 8일).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고 나서 일본 자경단들이 유언비어를 유포하면서 6천 명이 넘는 동포들을 학살하였다. 1938년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킨 후 강제 동원으로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이 늘어었다.
국권 피탈 이후 본격적으로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권업회의 초대 회장은 최재형이었다. 또한 이곳에서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37년에는 연해주의 한인들이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고 재산을 잃어버렸다. 대한 독립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홍범도도 이때 강주 이주되었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10년에는 통합 단체인 대한인 국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 조야에 일제의 야만성을 폭로,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4년 박용만은 하와이로 거점을 옮겨 대조선 국민 군단과 대조선 국민 군단 사관학교을 창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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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1925년 조선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 정신을 혼(魂)으로 파악하여, 혼이 담겨 있는 민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독사신론을 저술하였다. 신채호는 낭가 사상을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 사학은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은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인보는 ‘얼’ 사상을 강조하였다. 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기를 맞아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실증 사학자들은 문헌 고증으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역사가의 주관적인 판단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이병도 등은 1934년 진단 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간하였다.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다.
손진태는 조선민족사개론을 저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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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국어 연구 |
3⋅1 운동 이후 국문 연구소의 전통을 이어 이윤재, 최현배 등은 조선어 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이란 잡지를 간행하여 그 연구 성과를 정리, 발표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1926년)을 정하고 우리말쓰기를 권장함으로써 한글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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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제
|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은 직후부터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 농민들의 토지를 신고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근대적 소유권이 인정되는 토지 제도를 확립한다고 선전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의 실제 목적은 일제가 지세 수입을 늘려 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나아가 일본인이 쉽게 토지에 투자할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일제는 1910년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에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여 본격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
우리 농민은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신고 기간이 짧은 데 비하여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는 이와 같은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 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불법적으로 탈취당한 토지는 전 국토의 약 40%나 되었다.
토지에 대한 지주의 소유권만 일방적으로 인정하고 농민이 오랫동안 누려 왔던 관습적인 경작권을 부정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농민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기한부 계약에 따라 지주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이 늘어났다(입회권, 도지권 상실). 생활 기반을 상실한 농민은 일본인의 고리대에 시달리게 되었고, 생계 유지를 위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확보한 상당 부분의 국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헐값에 넘겼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농업 이주민은 동양 척식 주식회사로부터 토지를 매입하거나 개간 등을 통해 대지주가 되었다.
총독부는 지세 부과 대상을 크게 늘리고 토지 가격을 높이 책정하여 토지세를 더 많이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거둔 토지세의 대부분은 식민 통치를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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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는 민족 기업을 규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회사령은 기업의 설립을 총독의 허가제로 하고, 허가 조건을 위반할 때에는 총독이 사업의 금지와 기업의 해산을 명할 수 있게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억압되고 민족 산업의 성장이 저해되었다.
임업 부문에서 산림령에 따른 임야 조사 사업이 실시되어, 막대한 국⋅공유림과 소유주가 명확하지 않았던 임야가 거의 일본인에게 넘어가 전체 임야의 50% 이상이 조선 총독부와 일본인에게 점탈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어업령을 공포하여 일본 어민의 성장을 지원하고 우리 어민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전국의 광산 자원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우리 민족의 광업 활동을 제약하는 광업령을 제정, 공포한 후 일본인 재벌에게 많은 광산을 넘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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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 |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공업이 더욱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식량 문제에 부딪혔다. 이에 일제는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여 그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다수확 품종으로 벼 종자를 개량하고 비료 사용을 확대하였으며, 농토를 개간하고 밭을 논으로 바꾸었다. 또한 저수지나 제방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 수리 조합을 조직하였다.
일제는 쌀이 목표대로 증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에 따라 우리 농민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기아 선상에 허덕이게 되었다.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생산되는 값싼 잡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들은 토지를 집적함으로써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했다.
당시 우리 농민은 수리 조합비, 증산에 투입된 운반비 등도 부담함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받았고, 생계는 더욱 어려워져 갔다. 더욱 가난해진 많은 농민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만주 지역 등 해외로 떠나게 되었다.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쌀 가격 변동에 취약한 쌀농사 위주의 단작 농업이 정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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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독점 자본 침투 |
일제는 그들의 경제적 침투가 보다 편리하도록 회사령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일본 대재벌의 자본이 침투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각종 회사가 설립됨으로써 한국의 산업과 한국인의 경제 생활은 일본인에 의하여 지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를 폐지하여 일본 상품이 한국에서 더 싼값에 팔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일제는 신은행령을 발표하고 한국인 소유의 은행을 합병하는 등 금융 분야에서도 일본 자본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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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 |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다. 이 대공황은 급속도로 세계 각국에 파급되어 경제 파탄이 초래되었다. 경제 기반이 약했던 일본도 큰 타격을 받아 도시 실업자가 증가하고 농촌 경제가 붕괴되어 파업과 소작 쟁의가 빈번히 일어나 사회 불안이 증대되었고, 정부에 대한 불신은 나날이 높아 갔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군부는 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경제 공황의 타개책으로 대륙 침략을 감행하여 만주 사변(1931년)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 나라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고 일본의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만주 점령 이후 만주를 농업 원료 지대로, 한국을 중화학 공업 지대로 설정하고 조선 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공업화 정책으로 중화학 분야가 북부 지방에 편중되면서 지역 간, 산업 분야 간의 불균형이 심해졌다.
일제는 일본에 필요한 공업 제품의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면화의 재배와 면양의 사육을 시도하는, 이른바 남면 북양 정책을 수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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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농촌 진흥 운동 |
1930년대 초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농촌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면서 소작 쟁의가 확산되었다.
그러자 조선 총독부는 농촌 사회를 통제하고, 식민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1932년부터 농촌 진흥 운동을 실시하였으나 농민들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34년에는 조선 농지령을 제정하여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영 과정에서 소작농 관리자(마름)의 횡포를 통제하지 않고 지주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게다가 소작료도 여전히 높아서 법령의 제정만으로는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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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국가 총동원법 |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해지자 수많은 한국인 청년을 강제 동원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일제는 1943년에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여 많은 학생까지 전쟁터로 끌고 갔다. 1938년 지원병제, 1943년 학도 지원병제, 1944년 징병제 시행.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9년 국민 징용령, 1944년 여자 정신 근로령 시행.
일제는 수많은 여성들을 중국과 남양 군도 등지의 전쟁 지역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삶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놋그릇, 놋대야, 수저, 농기구, 교회와 사찰의 종 등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금속 제품이라면 가리지 않고 빼앗았다.
일제는 전쟁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산미 증식 계획을 다시 시행하였다.
일제는 농가마다 목표량을 정해 미곡 공출제와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
일제강점기 사회
|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변화 |
조선 총독부는 서울에 도시 개수 계획을 도입하여 도시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경복궁, 창경궁, 경희궁 같은 전통 건물을 마구 헐어 내고, 총독부, 경성부 청사, 경성 역사 같은 관공서와 공공 시설, 공원, 학교 등을 잇따라 건립함에 따라 서울의 모습은 점차 식민지 도시 풍경으로 변해 갔다.
1930년 무렵 서울에는 10만여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 일본인은 본정(현 충무로), 명치정(현 명동), 황금정(현 을지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리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의 일본인 거리는 남촌, 북쪽의 한국인 거리는 북촌으로 불렀다. 당시 남촌의 거리는 서울의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관공서, 은행, 백화점(화신, 미쓰코시), 상가, 도로 포장, 신호등, 가로등, 네온등 등 근대 도시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북촌의 거리는 그렇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도시를 중심으로 의식주와 같은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신문, 잡지와 같은 매체에 새로운 대중문화가 소개되어 유행하였다. 이에 ‘모던 걸, 모던 보이’와 같이 서양식 옷차림에 쇼핑과 외식을 즐기는 사람이 등장하였다. 서양 간식인 캐러멜이 소개되었다. 일본의 화학조미료인 아지노모도가 조선에 진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1920년대를 전후로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등의 잡지가 창간되었다.
도시에 사람이 몰리면서 이전에 볼 수 없던 주택이 나타났다. 1920년대 이후에 상류층의 문화 주택, 중류층의 개량 한옥, 중⋅하류층의 영단 주택이 등장하였다. 서울 변두리에는 빈민이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
일제강점기 문화
| 일제 강점기 종교 문학 예술 |
천도교의 지도자들은 3⋅1 운동을 주도한 후 제2의 독립 선언 운동을 계획하였다. 천도교에서는 개벽, 신여성,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민족 계몽에 노력하였다. 단군 신앙을 내세운 민족 종교인 대종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권이 침탈된 직후부터 만주로 이동하여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광단과 북로 군정서를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박중빈은 원불교를 창시하고,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자립 정신을 키워 갔으며, 남녀 평등, 허례 허식의 폐지 등 새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개신교는 국권 피탈 이후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걸쳐 민족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일제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여 그 지도자들의 일부가 체포, 투옥되기도 하였다. 불교에서는 일제가 한국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제정한 사찰령을 폐지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한용운은 조선 불교 유신론을 주장하여 민족 불교로서의 전통을 이어 갔다. 천주교는 민중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일부 신자는 만주에서 무장 항일 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광수는 그의 소설 무정이 계몽기의 신문학을 총결산할 만한 작품이라 평가될 정도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였다.
3⋅1 운동 이후, 문학계에는 그 이전까지의 계몽주의적 성격과는 다른 새로운 사조가 들어왔고, 이 때 일부 작가들은 동인지를 간행하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동인지는 창조, 백조, 폐허였다. 그리고 이 즈음에 개벽, 조선지광 등의 잡지가 출간되어 작품 발표의 기회가 많아져 문학 활동이 왕성해졌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현실과 계급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한 카프(KAPF, 조선플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자주 독립의 신념을 북돋워 주었다.
1930년대 이후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을 극렬히 드러내는 저항 문학이 등장하였다. 이육사의 <광야>, <절정>, 심훈의 <그날이 오면>,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서시>, <쉽게 쓰여진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대표적이다. 심훈의 <상록수>는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이육사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음악계에서는 홍난파와 현제명 등의 작품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잘 어울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편, 국외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애국가 합창을 넣은 ‘한국 환상곡’을 작곡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표현하였다.
미술에서는 이중섭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
3·1 운동 이후 토월회가 민중 계몽을 주장하며 신극 운동을 전개하였다. 토월회는 1923년 5월 일본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던 박승희·김복진·김기진·이서구·박승목·김을한·이제창 등이 조직하였다.
영화계에서는 나운규가 강렬한 민족 의식을 반영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아리랑(1926년)은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은 1922년 12월에 여의도 상공에서 수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국 방문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을 하여 라디오 방송을 송출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동아일보에 일장기가 삭제된 사진이 실렸다. 일제강점기 시기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이 장소를 번갈아 가면서 경평 축구 대회를 벌였다. |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핵심 개념 정리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1 – 선사 시대와 고대 국가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2 – 삼국~ 남북국시대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3 – 후삼국~고려시대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4 – 조선 전기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5 – 조선 후기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6 – 근대~국권 피탈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7 – 일제강점기
한국사 시험 모음
- 연표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1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1점 문제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고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중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초급
- 한국사 공무원 시험
- 한국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연표
- 선사 ~ 고조선 역사 연표
- 삼국 시대 역사 연표
- 통일 신라 발해 남북국 시대 역사 연표
- 후삼국·고려 시대 역사 연표
- 조선 전기 역사 연표
- 조선 후기 역사 연표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
- 일제 강점기 역사 연표
- 현대사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