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5 – 조선 후기

조선 후기 정치

광해군의
중립 외교
  • 중립 외교

명에 요청에 따라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사르후 전투에 참전했던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를 명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였다.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 기타

허준, 동의보감 편찬

경기도에 대동법 시행

조선 인조

1624년 인조 2년, 이괄이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를 이괄의 난이라고 한다.

인조는 공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정봉수는 용골산성에서 후금의 침입에 맞써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다.

한편 김상헌 등이 남한산성에서 화의에 반대하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

 

인조 때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이라 한다(1635년).

조선 후기
붕당 정치 전개
  • 정여립 모반 사건

붕당 정치 초기에는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정국이 운영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발생
↙    분화     ↘
북인(급진파) 남인(온건파)
서경덕, 조식 이황, 이언적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다.

또한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광해군의 영창 대군 살해와 인목 대비 유폐 등으로 결국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북인은 몰락하였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이란 이름으로 재야에서 그 여론을 주재하였다.

산림

시골에 은거해 있던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 대우를 받던 사람으로 붕당 정치기의 사상적 지주였다.

 

현종 때까지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 1차 예송

1659년 기해예송.

기년복 1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 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1년을,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첫째 아들로 대우하여 3년을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1년설이 채택되었다.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 2차 예송

1674년 갑인예송.

기년복 1년.

효종비가 죽은 뒤 또 자의 대비의 복제가 문제 되었는데, 서인은 9개월설을, 남인은 1년설을 주장하여 1년설이 채택되었다.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약화되고 남인 중심의 정국이 운영되었다.

조선 후기
붕당 정치와
탕평론의 대두
·
조선 숙종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숙종 초 정권을 장악한 남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숙종은 남인의 역모 사건 등을 계기로 남인을 처벌하고 서인으로 급격히 정권을 교체시켰다.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이 대거 축출되었다. 이를 경신환국이라 한다. 서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노론소론으로 나뉘었다.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적장자로 인정하여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남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송시열이 사형을 당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맞아들이고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을 교체시켰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서인(노론과 소론)이 주도권을 가졌다.

1682년 숙종 때 국왕의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금위영을 창설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의 탕평 정치

탕평비

조선 후기
정조의 탕평 정치
조선 후기
세도 정치
  • 세도 정치의 전개

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것을 세도 정치라고 한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하였다.

 

  • 세도 가문

안동 김씨 –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김조순이 왕의 장인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안동 김씨는 철종 때에도 세도를 누렸다.

풍양 조씨 – 헌종 이 8세로 즉위하자, 왕의 외조부인 조만영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 순조 수렴 청정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 때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 훈련도감 정상화

이들은 신유박해를 이용하여 정조가 규장각을 통하여 양성한 인물들을 몰아냈고, 장용영을 혁파하고 훈련도감을 정상화시켜 이를 장악하였다.

 

  • 안동 김씨

정순 왕후가 죽고 벽파 세력이 퇴조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김조순은 반남 박씨와 풍양 조씨 등 일부 유력 가문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 효명 세자의 견제 실패

순조 말년에는 효명 세자가 대리청정을 통하여 세도가들을 견제하고 권력 집단을 결집하려 했으나 갑자가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 헌종

헌종이 즉위하면서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가문이 득세하였다.

 

  • 철종

철종 때에 이르러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결국 안동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는 흥선 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 세도 정치기의 권력 구조

권력 구조에서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아래의 관리는 언론 활동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 맡게 되었다.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 세도 정치의 폐단

19세기의 세도 정권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능력도 지니지 못하였다.

세도 정권은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 세력인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향촌에서는 지방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권을 가지고 조세를 거두도록 하였다.

세도 정치기에는 관직이 매매되는 등 비리가 만연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더욱이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졌으며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 매관 매직의 실태

세도 정치하에서는 정치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고, 관리의 기강이 무너지면서 관직을 사고 파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감사 자리는 보통 5만~6만 냥, 수령 자리는 2만~3만 냥 정도에 거래되었다.

조선
비변사
  • 배경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면에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3사의 기능이 바뀌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비변사는 조선 중종 때 3포 왜란을 계기로 임시 회의 기구로 설치되었다.

명종 시기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관이 되었다.

비변사는 비국 또는 주사로 불렸다.

 

  • 비변사의 기능 강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조선 후기
군사 제도

임진왜란 초기에 어이없는 패전을 경험한 조정에서는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 그 결과, 훈련도감을 설치

훈련도감의 군병은 삼수병(포수, 사수, 살수)으로 편성, 이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무병이 아닌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가진 군인

 

인조 때 이괄의 난과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이 설치되었고, 숙종 때에 금위영이 추가로 설치되어 17세기 말에는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 순서

 

  • 속오군 체제 정비

조선 초기에 실시되던 진관 체제는 많은 외적의 침입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에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제승방략 체제가 임진왜란 중에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진관 체제를 복구하고 속오법에 따라 군대를 편제하는 속오군 체제로 정비하였다.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촌 사회를 지키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양반이 노비와 함께 속오군에 편제되는 것을 회피함에 따라 상민과 노비들만 남게 되었다.

진관 체제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로, 각 도에 한두 개의 병영을 두어 병사가 관할 지역 군대를 장악하고, 병영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설치하여 거진의 수령이 그 지역 군대를 통제하는 체제였다. 수군도 육군과 같은 방식으로 편제되었다.

제승방략 체제

유사시에 필요한 방어처에 각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앙에서 파견되는 장수가 지휘하게 하는 방어 체제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
  • 배경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1811년 세도 정권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다.

 

  • 과정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 의의와 실패 원인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의 농민이 하나로 뭉쳐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어 일어났고,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 영향

그러나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 뒤에 발생한 임술 농민 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1862년 철종 때 진주에서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고 한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 대외 관계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강화도에서는 김상용이 항전 끝에 순절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였으며, 어영청을 중심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변급과 신유가 지휘하는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 사대 관계를 맺고 사신이 왕래하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였으며, 어영청을 중심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에 청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호, 장려하고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조선 사신은 귀국 후에 기행문이나 보고서를 통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전하였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다.

이후 학자들 중에도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조선 정부는 청의 수도인 북경에 정기적으로 연행사를 파견했다.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1712년 조선 숙종 때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

이 정계비에서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관계
  • 일본의 국교 요청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 조선인 포로 송환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4년).

또한 160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1607년 부산 두모포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년).

1678년 부산 초량에 왜관이 건설되었다.

 

일본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에는 400~500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조선 후기 경제

조선 후기
수취 체제의 개편
  • 배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굶주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 전세 제도 개편

양 난 이후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농경지의 황폐와 전세 제도의 문란이었다. 이에 정부는 개간을 권장하면서 서둘러 경작지를 확충하고자 하였다. 또, 전세를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도 서둘렀다. 이것은 토지 대장인 양안에서 빠진 토지를 찾아 내어 전세의 수입원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런 정책으로는 농민의 삶을 향상시킬 수 없었다. 농민은 자신들의 고통을 줄여 주는 정책을 기대하였다.

 

인조 때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6두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이라 한다(1635년).

 

  • 공납 제도 개편

당시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던 것은 공납이었다. 특히, 방납의 폐해가 나타나면서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 갔다.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은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어 광해군 때 경기도에 한해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농민은 대체로 토지 1결당 미곡 12두만 납부하면 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에게 과중하게 부과되던 공물 부담은 없어지거나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도 왕실에 상납하는 진상이나 별공을 여전히 부담하였고, 지방 관청에서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특산물을 징수하였다.

선혜청을 설치하여 대동세의 출납을 관리하게 했다.

이후 조선 효종 때 김육의 건의로 경기도에 이어 충청도에서도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 상품 화폐 경제 발전

이와 같이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다.

 

  • 군역 제도 개편

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5군영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달랐다.

    • 군포 부담 증가

임진왜란 이후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역의 재원은 점차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군포의 부과량을 점차 늘릴 수밖에 없었다.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납속(納粟)

부족한 재정 보충 및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돈이나 곡물을 납부한 사람에게 특혜를 준 정책. 면천, 면역은 물론 관직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명첩(空名帖)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영조 때 균역법이 시행되었다(1750년). 이로부터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켰다.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 균역법의 폐해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군적 문란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 요약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
영정법 대동법 균역법
토지 1결당 미곡 4~6두 토지 1결당 미곡 12두 농민 – 1년 군포 1필

지주 및 상류층

결작 – 토지 1결당 미곡 2두

선무군관 – 군포 1필, 어장세, 선박세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 조세 수취가 불안정해지면서 국가에서는 안정적으로 세금을 확보하기 위해 세금의 총액을 미리 정하고 각 군현에 할당하는 조세 수취 방식을 채택하였다.

조선 후기 총액제 수취 방식은 관의 입장에서는 세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부담이 가중되는 방식이 되었으므로 19세기에 발생한 민란의 원인이 되었다.

 

  • 삼정의 문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산 관리들은 그 대가를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온갖 이름을 붙여 정해진 액수 이상을 거두어들였다.

당시 농민들이 주로 부담한 세금은 농토에 부과된 전세와 군포, 그리고 환곡이었다. 이를 삼정이라고 한다. 세금의 항목과 액수는 법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관리들은 새로운 항목을 만들어 정해진 양의 몇 배 이상을 거두었다.

 

환곡은 봄에 관청의 곡식을 농민들에게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서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자는 원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재원으로 사용되면서 세금처럼 되고 말았다.

여기에 탐관오리들의 토색질까지 겹쳐 실제로는 고리대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 지주들은 환곡을 빌리는 것을 기피하고, 가난한 농민들만 원치 않는 환곡을 떠맡아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다.

조선 후기
민영 수공업의 발달
  • 민영 수공업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시장 판매를 위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는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여 제품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대동법의 실시로 관수품의 수요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간 수공업자인 사장(私匠)들은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제품은 품질과 가격면에서 관영 수공업장에서 만든 제품에 비해 경쟁력도 높았다.

 

민간 수공업자의 작업장은 흔히 점(店)으로 불리어 철기 수공업체는 철점, 사기 수공업체는 사기점이라 하였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대체로 작업장과 자본의 규모가 소규모여서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상업 자본의 지배를 받았다.

대부분 공인이나 상인에게 주문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 독립 수공업자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수공업자 가운데서도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직접 판매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조선 후기
민영 광산의 증가
  • 정부 독점 채굴

광산은 본래 정부가 독점하여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였다.

 

  • 민영 광산 채굴 허용

정부는 17세기 중엽부터 설점수세제를 시행하여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인에 의한 광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설점수세제

조선 후기 정부 주도로 설점(設店)하여 광물 채굴을 허가하고 세금을 거둔 제도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가 있었지만, 몰래 채굴하는 잠채도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덕대(德大)

광산의 주인과 계약을 맺고 광물을 채굴하여 광산을 경영하는 사람

조선 후기
사상의 대두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도 활성화되었다.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자연 증가와 인구의 도시 유입도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더욱 촉진하였다.

 

1791년 정조는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도성 안에서 시전 상인이 아닌 난전의 상업 활동을 허락하였다. 이를 신해통공이라고 한다. 이로써 상인들은 보다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처음에는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다. 또한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동래부(東萊府, 현재의 부산)에서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의주에서 활동하던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부를 많이 축적하였다.

 

일부 공인과 사상은 독점적 도매상인인 도고로 성장하였다.

조선 후기
장시의 발달
  • 배경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를 토대로 하였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지방민의 교역 장소로,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다.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 대표적 장시

18세기 말의 장시 중에서 광주 송파장, 은진 강경장, 덕원 원산장, 창원 마산포장 등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연결하는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킨 상인은 보부상이었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한 행상으로서,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일정 지역 안이나 전국적인 장시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보부상(褓負商)

보부상이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단결을 굳게 하기 위하여 보부상단이라는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 후기
포구에서의 상업 활동
  • 상업 중심지가 된 포구

조선 후기에 들어 포구가 새로운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포구의 상거래는 장시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포구를 거점으로 선상, 객주, 여각 등이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다.

선상은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였는데,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상인이 대표적인 선상이었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다.

 

한편,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다.

조선 후기
중계 무역
  • 개시와 후시

조선 후기 중국, 일본 등을 상대로 공적으로 열었던 대외 교역 시장이었다.

압록강 하류에서 열리는 중강 개시와 함경도의 회령 개시 및 경원 개시, 동래의 왜관 개시 등이 열렸다.

 

조선 후기 사상들이 전개한 밀무역이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 중국의 회동관에서 이루어진 회동관 후시, 중강에서 이루어진 중강 후시, 의주 맞은편의 책문에서 이루어진 책문 후시가 대표적이다.

또 함경도 경원 등에서 야인들과 거래한 북관 후시, 부산 등의 왜관에서 왜인들과 거래한 왜관 후시가 있었다.

 

  • 청과의 무역

17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다.

청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 종이, 무명, 인삼 등이었다.

 

  • 일본과의 무역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은 인삼, 쌀, 무명 등을 팔고, 청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넘겨주는 중계 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다.

 

  • 대표적 상인

이러한 국제 무역에서 사적인 무역이 허용되면서 상인이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상인은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내상이었으며, 개성의 송상은 양자를 중계하며 큰 이득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

조선 후기
화폐 유통

조선 후기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상평통보

 

이 시기에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 신용 화폐 등장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환, 어음 등의 신용 화폐가 점차 보급되어 갔다. 이는 이 시기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과 상업 자본의 성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 후기
농민 경제 변화
조선 후기 고구마와 감자가 전래되어 재배

모내기법(이앙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

광작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

상품 작물 재배 – 쌀, 목화, 채소, 담배, 인삼 등을 재배하여 판매

수확량의 반(타조법)을 내던 소작료도 일정 액수(도조법)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남

타조법: 일정 비율로 소작료를 내는 방식

도조법: 일정 액수를 소작료로 내는 방식

 

조선 후기 사회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
  • 양반층의 분화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어 권력을 잡은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 다수의 양반은 이 과정에서 몰락하였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였다.

 

  • 향촌 사회에서의 신분 변동

부를 축적한 농민이 지위를 높이거나 역의 부담을 모면하려고 양반 신분을 사거나(공명첩)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였다.

양반의 수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감소하였다.

조선 후기
중간 계층의
신분 상승 운동
  • 배경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회 변동이 심화되는 가운데 서얼과 중인 등 중간 계층의 역할도 커졌다.

 

서얼에 대한 차별은 임진왜란 이후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하자, 서얼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납속(納粟)

부족한 재정 보충 및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돈이나 곡물을 납부한 사람에게 특혜를 준 정책. 면천, 면역은 물론 관직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명첩(空名帖)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

 

영⋅정조 때에 서얼을 어느 정도 등용하자,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수 차례에 걸쳐 집단으로 상소하여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제각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기술직 중인들은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며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청과의 외교 업무에 종사하면서 서학을 비롯한 외래 문화 수용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추구하였다.

조선 후기
노비의 해방
배경 – 노비의 신분 상승조선 후기에 노비는 군공과 납속 등을 통하여 부단히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노비종모법 – 노비의 신분 상승 추세는 아버지가 노비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으로 삼는 노비종모법이 실시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공노비 해방 –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노비안이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이름만 있을 뿐 신공을 받아 낼 수 없게 되자, 순조 때에 중앙 관서의 노비 6만 6000여 명을 해방시켰다(1801년).

노비제 종말 – 제1차 갑오개혁(1894년) 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제는 법제상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조선 후기
양반의 향촌 지배
약화
  • 배경

경제의 변동과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다.

평민과 천민 중에 재산을 모아 부농층으로 등장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양반 중에는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향촌 사회 내부에서 양반이 지녔던 권위가 점차 약해졌고, 새롭게 등장한 부농층(신향)과 기존 사족(구향)이 향촌 사회의 지배권을 두고 향전이 발생했다.

 

  • 기존 양반층의 영향력 유지 노력

양반의 명단인 청금록과 향안은 신문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 서류인 동시에 향약 등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중요시되었다.

 

    • 동약 실시

양반은 군현을 단위로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 사우가 많이 세워졌다.

 

  • 부농층의 도전

경제력을 갖춘 부농층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향회를 장악하여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하였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부농층의 성장 욕구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이해와 일치하여 정부도 이들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납속이나 향직의 매매를 통하여 이들 부농층 성장의 합법적인 길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 향임직 진출

부농층은 종래의 재지 사족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직에 진출하거나 기존 향촌 세력과 타협하면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여 갔다.

향임직(鄕任職)

향촌에 있는 향청(유향소)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나 그 직책을 말한다.

 

  • 결과
    • 수령과 향리의 관권 강화

종래의 재지 사족의 힘이 약화되고, 부농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이 충분히 강해지지 못한 가운데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고 아울러 관권을 맡아 보고 있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다.

종래에 재지 사족인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주로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에 의견을 물어 보는 자문 기구로 구실이 변하였다.

곧, 수령 중심의 국가 권력이 향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재지 사족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을 장악해 나갔다.

 

    • 농민 수탈

관권의 강화는 세도 정치 시기에 정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수령과 향리의 자의적인 농민 수탈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후기
농민층의 변화
  • 서민 지주 등장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지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지만, 일반 서민 중에서 농지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지주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 신분 상승 추구

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상승시키기도 하였다.

 

일부 농민이 부농층으로 성장하는 반면에, 일부 농민은 오히려 토지에서 밀려나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16세기 이래 부역제가 무너져 가면서 노동력 동원이 어려워진 국가나 관청에서 노임을 받고 성쌓기나 도로공사 등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부농층에 고용되어 어려운 삶을 영위해 나갔다.

조선 후기
사회 불안의 심화
  • 탐관오리와 각종 재난

탐관오리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 갔다.

또한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농민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지경이었다.

 

  • 서양의 이양선 등장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서양의 이양선까지 연해에 출몰하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갔다.

 

  • 도적의 등장

사회 불안이 점점 더해 감에 따라 각처에서는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화적은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지방의 토호나 부상을 공격하였고, 수적은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조운선이나 상선을 약탈하였다.

 

  • 예언 사상의 대두

사회가 변화하면서 유교적 명분론이 설득력을 잃어가자, 비기, 도참 등을 이용한 예언 사상이 유행하였다.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없는 낭설이 횡행하여 민심을 혼란시켰다.

여기에 무격 신앙이나 미륵 신앙도 점차 확장되어 갔다. 현세에서 얻지 못하는 행복을 미륵 신앙에서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심지어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서민을 현혹시켜 끌어모으는 무리도 나타났다.

 

왕조 교체를 예언한 정감록은 이 때에 널리 유행한 비기였다.

조선 후기
천주교의 전파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 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원래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지었으나,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18세기에 한글로 옮겼다.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 탄압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의 교세가 커진 것은 세도 정치로 말미암은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정조 때인 1791년 천주교도 윤지충 등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고, 이를 계기로 이들을 처형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집권하자, 천주교에 대탄압이 가해졌다. 1801년 이승훈, 정약종 등 3백여 명이 처형되었다. 정약용은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박해 소식과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을 알리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장 구베아에게 보내려고 했던 밀서가 발각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조선 후기
동학의 발생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주장을 폈다.

 

  • 사상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 동학의 중심 사상

인내천 사상, 현세 구복 사상, 후천 개벽 사상, 보국 안민 사상 등이 동학의 중심 사상이다.

 

  • 경전

동학의 경전으로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있다.

 

  • 탄압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생각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1864년).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조선 후기 문화

조선 후기
양명학의 수용
  • 실천성 강조

성리학의 절대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은 중종 때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 이단

학자들 사이에 관심을 끌어가던 양명학은 이황이 정통 주자학 사상과 어긋난다며 비판하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양명학은 인간의 마음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心卽理) 바탕으로, 인간이 상하 존비의 차별 없이 본래 타고난 천리(天理)로서의 양지를 실현하여 사물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치양지설(致良知說), 그리고 앎과 행함이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은 행함을 통해서 성립한다는 지행합일설( 知行合一說) 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18세기 초에 정제두는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몇몇 소론 학자가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학파로 발전시켰다.

조선 후기
실학의 등장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 중에 대표적인 것은 실학의 발달이었다.

실학은 17, 18세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의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었다.

 

  • 실학을 제기한 학자

이러한 새로운 문화 운동은 이수광, 한백겸 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1614년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하였다.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를 소개하였다.

 

    • 한백겸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 지리를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 실학의 종류

그 후, 실학은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국학 연구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이 때 청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 실학 연구의 목표

실학은 18세기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대부분의 실학자는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조선 후기
농업 중심의 실학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 실학자들을 경세치용 학파(중농 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으로,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반계수록은 조선의 국가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을 담았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균전론(均田論)

유형원은 관리, 선비, 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고 주장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18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한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곽우록>에서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성호사설>에서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전론(限田論)

이익은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으로, 지방 수령의 기본 자세를 다룬 목민심서, 중앙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과학 기술과 상공업 발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정약용의 여전론

이제 농사짓는 사람은 토지를 가지게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가지지 못하게 하려면, 여전제를 실시해야 한다. 산골짜기와 시냇물의 지세를 기준으로 구역을 획정하여 경계를 삼고, 그 경계선 안에 포괄되어 있는 지역을 1여(閭)로 한다. …… 1여마다 여장(閭長)을 두며, 무릇 1여의 인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한다. …… 여민이 농경하는 경우, 여장은 매일 개개인의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오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에 가져온 다음에 분배한다. 이 때, 국가에 바칠 세와 여장의 봉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가지고 노동 일수에 따라 여민(閭民)에게 분배한다.

여유당전서

조선 후기
상공업 중심 실학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북학파

청의 수도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청의 수준 높은 문물을 목격하고, 이를 수용하자고 주장한 실학자들을 말한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
국학 연구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다.

 

  • 역사

이익의 제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하였다.

동사강목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이를 체계화하였다.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여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 한치윤

한치윤은 500여 종의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 이종휘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하였다.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고, 북쪽에 발해가 있었으므로 이를 남북국이라 불러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 지방에 자리잡아 고구려라 했고, 부여씨가 서쪽 지방에 머무르면서 백제라 했으며, 박씨, 석씨, 김씨가 동남 지방에 살면서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에 대한 사서가 있어야 할 텐데, 고려가 이것을 편찬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한 후에 김씨가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가 북쪽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했으니,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거기에는 마땅하게 남북국의 사서가 있었을 텐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발해고>

 

  • 지리서

국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었다.

 

    • 한백겸

역사 지리서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가 나왔다.

 

역사 지리서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이 나왔다.

 

인문 지리서로 이중환의 택리지가 편찬되었다.

이 책은 자연과 인간 생활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에서 주목된다.

택리지

각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물산, 풍속, 인심 등을 서술하고, 어느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인가를 논한 책

 

  • 지도

중국에서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영조 시기 제작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하고,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었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 국어
    • 신경준

신경준의 음운 연구서인 훈민정음운해가 나왔다.

 

    • 유희

유희의 음운 연구서인 언문지가 나왔다.

 

    • 이의봉

우리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의 고금석림이 편찬되었다.

 

  • 백과 사전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 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나라가 가난하게 된 원인은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제도 등이 잘못된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고리대 활동과 농민의 게으름도 큰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 이덕무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 이규경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영⋅정조 때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 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 사전이다.

 

  • 기타

김정희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정약전자산어보를 편찬하였다.

조선 후기
서양 문물 수용
  • 서양 문물의 수용 과정

서양 문물은 17세기경부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을 통해서 들어왔다. 선조 때 이광정은 세계 지도를 전하고, 인조 때 정두원은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전하였다.

당시 명⋅청의 수도인 베이징에는 서양 선교사가 있었는데, 조선의 사신은 이 곳에서 이들과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소개받았다.

 

  • 서양 문물과 실학자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익과 그의 제자들 및 북학파 실학자들이었다.

이익의 제자 중에서 일부는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는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면서도 천주교는 배척하였다.

 

17세기에는 벨테브레이와 하멜 일행이 우리 나라에 표류해 왔다.

벨테브레이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서양식 대포의 제조법과 조종법을 가르쳐 주었고,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지어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전하였다.

 

  • 벨테브레이(Weltevree)

인조 때 제주도에 표류하여 귀화하였다. 조선 여성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고 하며, 박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
천문학과 지도
  • 천문학

천문학은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 김석문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시켰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의산문답>을 저술하여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주해수용을 저술하여 조선ㆍ중국ㆍ서양 수학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였다.

지구가 9만 리를 한 바퀴 도는데 그 회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런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가 겨우 절반이라도 몇 천만, 몇 억 리나 될지 알 수 없다. 하물며 별 밖에 또 별이 있음에랴. 우주 공간에 한계가 없다면, 별이 분포하는 영역에도 한계가 없다. 그 별들이 한 바퀴 돈다고 말한다 해도 그 궤도의 둘레가 얼마나 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하루에 얼마나 빨리 회전할지 상상해본다면, 천둥·번개와 포탄의 속도를 계산하더라도 이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이다.

≪담헌서≫ <의산문답>

 

역법은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도입되었다. 이는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청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채용하였다.

시헌력(時憲曆)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역법

 

    • 곤여만국전도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하여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최한기가 저술한 지구전요는 국외의 각종 지리서를 참조하여 편찬한  세계지리서이다.

조선 후기
의학, 농학,
기술 개발
  • 의학

허준의 <동의보감> – 17세기 초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책은 우리의 전통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뛰어난 의학서로 인정되었다.

허임의 <침구경험방> – 허임은 침구경험방을 저술하여 침구술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의 <마과회통> – 정약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편찬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하였다.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 19세기에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 의학을 확립하였다. 이는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하여 치료하는 체질 의학 이론으로, 오늘날까지도 한의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 농업

신속의 <농가집성> – 17세기 중엽에 신속은 농가집성을 펴내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 19세기에 서유구는 농업과 농촌 생활에 필요한 것을 종합하여 임원경제지라는 농촌 생활 백과 사전을 편찬하였다.

 

  • 기술

정약용은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펴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었는데, 이 거중기는 수원 화성을 쌓을 때에 사용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배다리도 설계하였다.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발달

허균의 홍길동전, 춘향전 등. 한글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가 등장했다.

세책가에서 도서를 대여했다.

 

판소리 작품으로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 다섯 마당만 전하고 있다. 신재효는 19세기 후반에 이런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하였다.

장시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는 판소리와 탈춤 공연이 인기를 얻었다.

 

  • 탈놀이

탈놀이산대놀이는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와 함께 성행하였다. 이런 가면극에서는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승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시조에는 서민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역관 등 중인층과 서민층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호인들이 모여 시사를 조직하였다.

 

정약용은 삼정의 문란을 폭로하는 한시를 남겼다.

 

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의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 회화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풍속화민화가 유행하였다.

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 서예

진경 산수화는 중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한 것이었다.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이었다. 그는 서울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여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은 대표작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에서 바위산은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은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정경과 일상적인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어 회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풍속화에 새 경지를 열어 놓은 화가는 김홍도였다. 그는 정감어린 풍속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밭갈이, 추수, 씨름, 서당 등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런 그림에서 18세기 후반의 생활상과 활기찬 사회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주막

무동

서당도

씨름

산수인물도

 

김홍도에 버금 가는 풍속화가로는 신윤복이 있었다. 그는 주로 양반과 부녀자의 생활과 유흥, 남녀 사이의 애정 등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하였다.

연소답청

쌍검대무

월하정인

 

파적도

 

    • 전기

매화초옥도

 

이 밖에도 강세황 등의 화가가 개성 있는 그림으로 18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강세황은 서양화 기법을 반영하여 사물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영통동구도

 

19세기에 이르러 장승업은 강렬한 필법과 채색법으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김정희는 문인화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

 

  • 서예

이광사 – 서예에서도 우리의 정서와 개성을 추구하는 단아한 글씨의 동국진체가 이광사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김정희 – 김정희는 우리 서예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여 굳센 기운과 다양한 조형성을 가진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조선 후기
건축의 변화
  • 17세기

17세기의 건축으로는 김제 금산사 미륵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보은 법주사 팔상전 등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규모가 큰 다층 건물로, 내부는 하나로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불교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양반 지주층의 경제적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 내부에 부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가 있다.

조선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김제 금산사 미륵전

 

  • 18세기

18세기에는 사회적으로 크게 부상한 부농과 상인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근거지에 장식성이 강한 사원이 많이 세워졌다.

논산 쌍계사, 부안 개암사, 안성 석남사 같은 사원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건축물은 수원 화성이다. 정조 때의 문화적인 역량을 집약시켜 새롭게 만든 화성은 이전의 성곽과는 달리,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을 겸한 성곽 시설로, 주위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며 평상시의 생활과 경제적 터전까지 조화시킨 종합적인 도시 계획 아래 건설되었다.

수원 화성

 

거중기

화성성역의궤

 

  • 19세기

19세기의 건축으로는 흥선 대원군이 국왕의 권위를 높일 목적으로 재건한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가 화려하고 장중한 건물로 유명하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경회루

조선 후기
백자와 음악
  • 청화 백자

조선 후기에는 산업 부흥에 따라 공예가 크게 발전하였다.

자기 공예에서 백자가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청화 백자가 유행하는 가운데 형태가 다양해지고, 안료도 청화, 철화, 진사 등으로 다채로웠는데, 제기와 문방구 등 생활 용품이 많았다.

 

청화백자

조선 후기 달항아리 백자

 

  • 음악

음악에 있어서도 산업 부흥에 따라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음악의 향유층이 확대됨에 따라, 성격이 다른 음악이 다양하게 나타나 발전하였다. 양반층은 종래의 가곡, 시조를 애창하였고, 서민은 민요를 즐겨 불렀다.

이와 함께 상업의 성황으로 직업적인 광대나 기생이 판소리, 산조와 잡가 등을 창작하여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더욱 강하였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핵심 개념 정리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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