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을미의병(1895년)
원인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내용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해산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활빈당
을미의병의 활동 후, 해산된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침략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을사의병(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내용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을사늑약에 대한 항거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다.
이재명
이재명은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민영환 순국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5적 암살단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을사 5적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
시티븐스 저격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정미의병(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내용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13도 창의군(1908년)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한 대토벌 작전(1909년)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 투쟁은 그 후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교과서(금성출판사, 비상교육)
관련 문서
- 항일 의병 운동 관련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 모음
- 항일 의병 운동 관련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출 모음
- 항일 의병 운동 관련 공무원 시험 기출 모음
- 한국사 이론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 한국사 이론 전체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