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배경
미국·소련 군대 철수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38도선 무력 충돌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중국의 공산화 및 중·소의 북한 지원
1949년 10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공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중국은 물론 소련에서도 군사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6⋅25 전쟁 전개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의 참전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중공군 참전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1·4후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전세는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정전 협정
소련의 정전 제안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국제 연합(UN)에 정전을 제안하였다.
정전 회담 쟁점
정전 회담의 주요 쟁점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다.
반공 포로 석방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2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정전 회담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년).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참고: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교과서(금성출판사, 비상교육, 동아출판, 해냄에듀)
관련 문서
- 6⋅25 전쟁 관련 수능 및 모의고사 기출 모음
- 6⋅25 전쟁 관련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출 모음
- 6⋅25 전쟁 관련 공무원 시험 기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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