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3 – 후삼국~고려시대

후삼국 시대

후삼국 성립
  • 900년, 견훤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움
  • 후백제는 중국 후당, 오월과 외교 관계
  • 901년,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에서 양길의 밑에서 시작해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움
  • 후고구려는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김
  • 904년 궁예는 최고 정치 기구인 광평성 등을 마련
  •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함
  • 궁예는 무태, 성책 등의 독자적 연호를 사용
  • 궁예는 지나친 수취와 전제 정치로 인해 왕건 등에 의해 축출됨
후삼국 통일
  •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을 점령하여 광평성 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름
  • 918년, 태조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김
  •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고려로 망명. 태조 왕건은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함.
  • 927년, 견훤이 신라 왕경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신라를 돕기 위해 출전한 고려를 공산에서 대패시킴(공산 전투). 고려의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함.
  •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가 고려에 대패 당함
  • 935년 3월, 후백제 내분으로 견훤의 아들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킴.
  • 935년 6월 견훤이 고려에 귀순.
  • 935년 11월, 통일 신라 경순왕, 고려에 항복. 태조 왕건, 경순왕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
  • 936년, 후백제의 신검이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에 대패당함. 후백제 멸망, 고려 후삼국 통일

 

고려 정치

 

고려 태조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기구로 흑창 설치(춘궁기에 곡식을 나눠 주고 추수 후에 갚게 했던 빈민 구제 기구)

태조는 지방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 호족의 딸과 혼인하고, 왕씨 성을 하사하는 사성 정책 실시

건국 공신들을 사심에 임명하여, 각 자기 출신 지역의 부호장 이하의 임명을 맡게 하는 제도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인질로 삼고,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자문을 맡게 하는 제도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공훈에 대한 대가로 준 논공행상적 성격의 토지

  • 천수라는 연호 사용

고려 태조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그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모두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

고려 정종

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광군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했다. 설치 당시의 병력은 30만 명이었다.

고려 광종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

쌍기의 건의로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고 신구 세력의 교체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 제정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외왕내제),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

고려 경종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전시과 제도를 운영

고려 성종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 정치사상을 통치의 근본 이념으로 삼고 여러 제도의 정비를 요구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한 2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제도 새로 마련

983년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지방관을 파견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

  • 유학 교육 진흥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

태조 때 설치됐던 흑창이 의창으로 개칭, 확대

물가를 조절하여 빈민을 구제하던 기관인 상평창 설치

철전인 건원중보가 만들어짐

  • 강동 6주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

광종 때 노비안검법으로 노비에서 양인이 된 자를 노비로 다시 환원하는 법을 제정

고려 목종
고려 현종
  • 전국을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는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
  •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초조대장경 간행
고려 문종
고려
무신정권기

1170년, 의종이 개경 부근의 보현원에서 놀이를 즐길 때를 이용하여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귀양 보낸 다음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

무신 간 내분으로 정중부가 피살되고,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됨.

중방 – 최고위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

무신 집권자의 변화: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

 

최씨 정권의 성립 – 1196년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4대 60여년간 최씨 정권이 지속됨

명종 때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

교정도감 – 희종 때 설치된 최씨 정권 최고 권력 기구.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아버지인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1225년)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

서방을 설치하여 유명 문신을 머무르게 하며 정권 운영의 고문을 담당

고려 고종은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몽 항쟁을 위해 강화 천도

삼별초 설치. 삼별초는 도방과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1173년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에서 무신 정권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의종의 복위를 추진했지만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1174년,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킴. 이의민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여 상장군이 됨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

1193년,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킴

1198년, 고려 신종 때 개경에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 사전 발각 후 실패

    • 이연년 형제의 난

1237년, 고려 고종 때 원율과 담양 지역에서 이연년 형제가 봉기를 일으켰다. 김경손이 이를 진압했다.

고려
충렬왕
고려
충목왕
  • 폐정 개혁을 목표로 정치도감을 설치하였다.
고려
충선왕
  • 1314년 원에서 만권당을 설치하여, 이제현 등 고려 유학자와 조맹부 등 한족 출신 유학자를 불러모아 서로 교류하게 함
고려
공민왕
고려
중앙 정치 조직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중서문하성

  • 중서문하성은 고려의 최고 관서로서,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 중서문하성은 재신과 낭사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국가의 정책을 심의하고, 낭사는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 낭사는 어사대의 관원과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 재신은 중추원의 추밀과 함께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의 구성원이었다.

 

상서성

  •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 6부 – 6부에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가 소속되어 있었다.

 

중추원

  • 송의 제도를 본따 만든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 군사 기밀을 담당하면서 재신과 함께 국정을 총괄하는 추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선으로 구성되었다.
  • 추밀은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함께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의 구성원이었다.

 

삼사

  • 삼사는 송나라와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맡았다.

 

어사대

  •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대간

  • 대간은 어사대의 관원과 중서문하성의 낭사로 구성된다.
  •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지고 있었다.

 

도병마사

  • 도병마사는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관청으로,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방, 군사 문제를 논의하였다.
  • 도병마사는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였으나,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도당)로 개편되면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 사항을 담당하는 최고 정무 기구로 발전하였다.
  •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식목도감

  • 식목도감는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관청으로,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었다.
  • 식목도감은 임시 기구로서 국내 정치에 관한 법의 제정이나 각종 시행 규정을 다루던 회의 기구였다.
  •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고려
지방 행정 조직

성종 때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지방관을 파견

 

현종 때 전국을 5도와 양계(동계,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는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

 

    • 5도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 도 아래,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

 

    • 양계

북방의 국경 지대에는 동계⋅북계의 양계를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군사적인 특수 지역이었다.

 

초기의 3경으로 개경(개성), 동경(경주), 서경(평양)을 두었고, 후기에는 개경(개성), 남경(양주목, 서울), 서경(평양)을 둠

 

  • 주현⋅속현

하나의 주현에는 여러 개의 속현과 향, 부곡, 소 등이 소속.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음.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의 행정 지배를 받음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소는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음. 향⋅부곡의 주민은 농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은 수공업에 종사

양민이면서 군현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에 거주한 주민은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고 있었다.

고려 군사 제도
  • 고려의 군사 제도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구성된 국왕의 친위 부대였다.

 

  • 지방군

군적에 오르지 못한 일반 농민으로 16세 이상의 장정들은 지방군으로 조직되었다.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고려
관리 등용 제도
  • 고려 관리 등용 제도

고려의 관리는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제술과: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중서문하성의 높은 관리가 되고 싶은 귀족은 주로 제술과에 응시하였다.

명경과: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잡과: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을 시험하여 기술관을 뽑았다.

승과: 승직자를 뽑기 위한 시험이었다.

 

  • 응시 자격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다.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하기도 하였다.

원칙적으로 18세 이상이 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 중앙 지배층의 형성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가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으로 형성되어 갔다.

 

문벌 귀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을 뜻한다.

 

  • 권력과 경제력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 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거의 독점하였다.

 

  • 혼인

이들은 비슷한 부류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장악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 모순 표출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리 중에서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은 이들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고려
이자겸의 난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 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 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자겸의 세력은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금과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이러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한 왕의 측근 세력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고려 인종 1126년).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몰려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서경 천도 운동

고려 인종 시기 묘청·정지상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다.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묘청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1135년).

이들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 이 사건은 실제로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 이것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

 

고려 대외 관계

고려
거란의 침입
  • 거란의 1차 침입

993년 고려 성종 때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 서희의 담판 외교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

 

  • 거란의 2차 침입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

 

  • 거란의 3차 침입

1018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 강감찬이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시킴(귀주대첩).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음

고려
여진 정벌
숙종 때 윤관의 지휘 아래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자,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

별무반 –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

1107년, 예종 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면 지역에 동북 9성을 설치

1115년, 예종 때 강성해진 여진족은 금을 건국. 금은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고,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임

고려
몽골의 침입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225년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 몽골의 1차 침입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은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킴

 

  • 몽골의 2차 침입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

 

  • 몽골의 3차 침입

1236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송문주가 죽주성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 몽골의 5차 침입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

 

  • 피해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 종결. 1270년, 고려 원종 때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

 

1270년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삼별초

최우가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으로 구성

원의
내정간섭
원과 강화를 맺은 이후 고려는 독립국의 지위는 유지하였으나 원의 간섭을 받음

고려 충렬왕 때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

원은 일본 원정을 계기로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에 내정간섭

  • 관제 변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하고, 6부는 4사로 통폐합되었으며, 중추원은 밀직사로 격하

  • 영토 상실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 설립

원은 공녀라 하여 결혼도감을 설치하고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감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

  • 부마국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변화

원 간섭기
사회 변화
원과 강화를 맺은 이후 고려는 독립국의 지위는 유지하였으나 원의 간섭을 받음

권문세족 등장 –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이 권문세족으로 성장

몽골풍 – 고려 사회에는 몽골풍이 유행하여 변발, 몽골식 복장(호복), 몽골어가 궁중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짐

고려양 –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의 풍습이 몽골에 전해졌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일컬음

홍건적의 침입 1359년 1차 침입 때 안우, 이방실 등이 홍건적을 격파

1361년 2차 침입 때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멀리 안동(복주)까지 피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이 성장

왜구의 침입 고려 말 공민왕 때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았다.

최영, 이성계 등이 나서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진포 대첩에서 왜구를 격퇴했다.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침입했을 때 최영이 홍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했다.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의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했다.

고려의
화약 무기 제조
  • 1377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
  • 최무선은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 하구) 해전에서 왜구를 격퇴

 

고려 경제

고려
전시과 제도와
토지 소유

태조 때에 역분전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준 토지였다.

시정 전시과 제도는 경종 때에 공복 제도와 역분전 제도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관직의 높고 낮음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여 토지를 지급하였다.

목종 때 기존 전시과를 개정하여 관직만을 고려하여 지급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지급량도 재조정하였다.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문종 때에 현직 관료에게만 주도록 다시 조정하였다.

  • 내용

문무 관리로부터 군인,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곡물을 수취할 수 있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주었다.

  • 수조권만 지급

지급된 토지는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만 가지는 토지였다.

  • 반납

관직 복무와 직역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었으므로 토지를 받은 자가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 기타

문벌 귀족의 세습적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은 공음전이었다.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데,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었다. 이는 음서제와 함께 귀족의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었다.

한인전은 6품 이하 하급 관료의 자제로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인데, 이것은 관인 신분의 세습을 위한 것이다.

군인전은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로, 군역이 세습됨에 따라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하급 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하여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점차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세습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전시과 제도가 원칙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민전은 매매, 상속, 기증, 임대 등이 가능한 사유지로서, 귀족이나 일반 농민의 상속, 매매, 개간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고려 경제 활동 고려 말, 논농사는 직파법 대신에 이앙법(모내기법)이 남부 지방 일부에 보급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

고려 후기, 이암이 중국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소개

문익점은 목화씨를 가져와 목화 재배가 이루어짐

개경에 경시서를 두어 상행위를 감독

소금 전매제 시행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 등 대도시에 서적점, 주점, 다점 등 관영 상점을 둠

성종 때 건원중보, 숙종 때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듦

건원중보

삼한통보

해동통보

활구(은병)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고려 사회

고려
신분 제도
  • 고려의 신분 제도

고려의 신분 구성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략 귀족과 중류층, 그리고 양민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귀족 세력은 왕족을 비롯하여 5품 이상의 고위 관료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음서공음전의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었다.

하지만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형벌로 귀향을 시키기도 하였다.

 

귀족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차지하여 문벌 귀족을 형성하였으며, 고려 사회를 이끌어 갔다.

중앙 관직에 진출한 집안은 귀족 가문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관직을 바탕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하는 등 재산을 모았고, 유력한 가문과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귀족이 사돈맺기를 가장 원하는 집안은 왕실이었다.

 

  • 무신

귀족층의 변화는 무신정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종래의 문벌 귀족이 약화되면서 무신이 권력을 잡았다.

 

무신 정권이 붕괴되면서 등장한 귀족은 권문세족이었다.

이들은 고려 후기에 정계의 요직을 장악하고 대농장을 소유한 최고 권력층이었으며,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 음서로써 신분을 세습시켜 갔다.

권문 세족은 고려 후기의 정치, 경제면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보수적인 사회 세력이었다. 이들은 첨의부나 밀직사 등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고,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으로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권문세족

종래의 문벌 귀족 가문, 무신 정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원과의 관계를 통하여 성장한 가문 등을 말한다.

 

  • 중류층

고려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는 중류층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지배 기구의 말단 행정직으로 존재하였는데,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한 향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직역을 세습적으로 물려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토지를 국가에서 받았다. 하지만 향리가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각 지방의 호족 출신은 향리로 편제되어 갔다. 호족 출신들은 호장, 부호장을 대대로 배출한 지방의 실질적 지배층이었다.

 

    • 호장(戶長)

향리직의 우두머리로 부호장과 함께 해당 고을의 모든 향리가 수행하던 말단 실무 행정을 총괄하였다.

 

  • 양민

양민은 일반 주⋅부⋅군⋅현에 거주하면서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양민의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이들을 백정(白丁)이라고도 한다.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양민이면서 군현민과 구별되는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에 거주한 주민은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고 있었다.

고려 후기에는 향, 부곡, 소가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 천민

천민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노비는 공공 기관에 속하는 공노비와 개인이나 사원에 예속된 사노비가 있었다.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였다. 매매, 증여, 상속의 방법을 통하여 주인에게 예속되어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귀족은 재산으로 간주된 노비를 늘리기 위하여 부모 중의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게 하였다(일천즉천).

천민으로는 노비, 화척, 재인(광대), 진척(뱃사공), 역정(마부) 등이 있었다.

 

  • 공노비

입역 노비: 궁중과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아에서 잡역에 종사하면서 급료를 받고 생활하였다.

외거 노비:  지방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농경을 하여 얻은 수입 중에서 규정된 액수를 관청에 납부하였다.

 

  • 사노비

솔거 노비: 귀족이나 사원에서 직접 부리는 노비로서 주인의 집에 살면서 잡일을 돌보았다.

외거 노비: 주인과 따로 사는 노비로서 주로 농업 등의 일에 종사하고 일정량의 신공을 바쳤다.

또한 외거 노비는 주인의 토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토지도 소작할 수 있어서, 노력에 따라서는 경제적으로 여유를 얻을 수 있었으며, 자신의 토지도 소유할 수 있었다.

외거 노비 중에는 재산을 모아 양인의 신분을 얻는 자도 있었다.

고려
백성의 생활 모습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香徒)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이다.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었다.

풍년에는 곡물을 사들이고 흉년에는 곡물을 풀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다.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하게 하였다.

 

각종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 혼인과 여성의 지위

고려 시대에는 여자는 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에 혼인을 하였다.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하였다. 중기 이후 여러 번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 여성의 지위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고려
교육 기관
  • 관학

중앙에는 국립 대학인 국자감(국학)이 설치되었다.

국자감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같은 유학부와 율학, 서학, 산학 등의 기술학부가 있었다.

유학부에는 문무관 7품 이상 관리의 자제가 입학하고, 기술학부에는 8품 이하 관리나 서민의 자제가 입학하였다.

 

    • 향교

지방에는 향교가 설치되어 지방 관리와 서민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 사학

최충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문종 때 최충이 세운 9재 학당으로, 사학 12도 중에서 가장 번성하여 명성이 높았다. 최충이 사망한 후 그의 시호인 문헌을 이름으로 붙였다.

 

사학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자감의 관학 교육은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관학 진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였다.

숙종 때 국자감을 강화하고자 서적포를 두어 도서 출판을 활발히 하였다.

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7재라는 전문 강좌를 설치하고, 양현고라는 장학 재단을 두어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 청연각과 보문각이란 학문 연구소를 두어 유학의 발달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 충선왕

충선왕 때에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공자 사당인 문묘를 새로 건립하여 유교 교육의 진흥에 나섰다.

    • 공민왕

공민왕은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고 유교 교육을 강화하였다.

 

고려 문화

고려
불교 통합 운동과
천태종
의천 – 천태종, 교관겸수

  • 대각국사 칭호 받음
  • 문종의 왕자로서 승려가 됨
  • 교단 통합 운동
  •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 노력
  •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해동 천태종을 창시
  •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 제창
  • 원효의 화쟁 사상을 토대로 하여 불교 사상을 통합 노력
  • 개경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교장 간행
  •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킬 것을 주장
교관겸수(敎觀兼修)

교학과 선을 함께 수행하되, 교학의 수련을 중심으로 선을 포용하려는 통합 이론

고려
불교 결사 운동
지눌 – 정혜쌍수, 돈오점수, 송광사 수선사 결사 운동

  • ‘불일보조국사’ 시호
  •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 제창
  •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
  •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 선도
  •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 주장
  •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
  •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혜심 – 유불일치설

  • 지눌의 제자
  • 수선사의 제2대 사주
  • 유불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 마련
  • 선문염송설을 편찬

요세 – 백련 결사

  •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법화 신앙을 바탕으로 백련 결사 제창
고려
불교 정책

태조는 개경에 여러 사원을 세웠고, 훈요 10조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할 것을 당부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침을 제시하였다.

팔관회

 

광종 때부터 승과 제도를 실시하여 합격한 자에게는 승계(僧階)를 주고 승려의 지위를 보장하였다.

국사와 왕사 제도를 둠으로써 불교의 권위가 상징적으로나마 왕권 위에 존재하게 되어 불교가 국교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고려
대장경 간행
  • 대장경 간행

고려에서는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 체계가 정비되면서 불교에 관련된 서적을 모두 모아 체계화하는 대장경이 편찬되었다.

경⋅율⋅논의 삼장으로 구성된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교리 체계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 의의가 높은 유산이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70여 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목판에 새겨 간행한 이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에 불타 버리고 인쇄본 일부가 남아 고려 인쇄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 의천은 고려는 물론이고 송과 요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속장경(교장)을 편찬하였다.

이를 위하여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10여년에 걸쳐 신라인의 저술을 포함한 4700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였다.

 

몽골 침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고종 때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이룩한 재조대장경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 8만 장이 넘는 목판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잘못된 글자나 빠진 글자가 거의 없는 제작의 정밀성과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고려
성리학의 전래
  •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다.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는 원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 이제현은 원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 공민왕 때 이색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켰다.
  •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은 대부분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유교적인 생활 관습을 시행하고자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고려
신진 사대부의 성장
  • 성리학의 수용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는 원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가운데 성리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 부른다.

 

  •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공민왕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의 정계 진출이 확대되었고,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의 향리 자제들로,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고려
도교와 풍수지리설

불로장생과 현세의 구복을 추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도교는 여러 가지 신을 모시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며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 초제

고려에서는 도교 행사가 자주 베풀어졌고, 궁중에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초제가 성행하였다.

 

  • 민간 신앙

도교에는 불교적인 요소와 도참 사상도 수용되어 일관된 체계를 보이지 못하였으며, 교단도 성립하지 못한 채 민간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국가적으로 이름난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는 팔관회는 도교와 민간 신앙 및 불교가 어우러진 행사였다.

 

풍수지리설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도참 사상이 더해져 고려 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개경과 서경이 명당이라는 설이 유포되어 서경 천도와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 길지설

길지설은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 한양 명당설

문종을 전후한 시기에는 북진 정책의 퇴조와 함께 새로이 한양 명당설이 대두하여 이 곳을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궁궐을 지어 왕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 도선의 풍수지리 사상

도선은 선종 계통의 승려로서, 전 국토의 자연 환경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인문 지리적 지식에다 경주 중앙 귀족의 부패와 무능, 지방 호족의 대두, 오랜 전란에 지쳐서 통일의 안정된 사회를 염원하는 일반 백성의 인식을 종합하여 체계적인 풍수 도참설을 만들었다.

고려
역사서 편찬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왕조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에,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현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 때 완성하였다.

인종 때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본기, 연표, 잡지, 열전 등으로 구성된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신라 계승 의식이 많이 반영되었다.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은 삼국 시대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고려 명종 때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또한 무신집권기의 사회 혼란 속에서 고려의 역사 전통을 고취할 목적으로 썼다.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이제현은 사략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지금은 사략에 실렸던 사론만 전한다.

고려
천문학과 의학

천문과 역법을 맡은 관청으로서 사천대(서운관)가 설치되었고, 이 곳의 관리는 첨성대에서 관측 업무를 수행하였다.

충렬왕 때 사천대가 서운관으로 개칭되었다.

 

    • 역법 연구

역법 연구에서도 착실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던 당의 선명력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의 충선왕 때에는 원의 수시력을 채용하고 그 이론과 계산법을 충분히 소화하였다.

수시력(授時曆)

1년을 365.2425일로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300년 후인 16세기 말 서양에서 개정한 그레고리우스력과 같다.

 

의료 업무를 맡은 태의감에서 의학 교육을 실시하고, 의원을 뽑는 의과를 시행하여 고려 의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고려 중기의 의학은 당⋅송 의학의 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의학으로 발달함으로써 향약방이라는 고려의 독자적 처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향약구급방을 비롯한 많은 의서가 편찬되었다.

13세기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의학 서적으로, 각종 질병에 대한 처방과 국산 약재 180여 종이 소개되어 있다.

고려
인쇄술

신라 때부터 발달한 목판 인쇄술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달하였다. 고려대장경의 판목은 고려의 목판 인쇄술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목판 인쇄술은 한 가지의 책을 다량으로 인쇄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여러 가지의 책을 소량으로 인쇄하는 데에는 활판 인쇄술보다 못하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활판 인쇄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기에 금속 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고려 시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목판 인쇄술의 발달, 청동 주조 기술의 발달, 인쇄에 적합한 먹과 종이의 제조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는 이미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몽골과 전쟁 중이던 강화도 피난시에는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다(1234). 이는 서양에서 금속 활자 인쇄가 시작된 것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다.

상정고금예문은 12세기 인종 때 최윤의 등이 지은 의례서인데, 강화도로 천도할 때 예관이 가지고 오지 못하여 최우가 보관하던 것을 강화도에서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였다.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1377년)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

직지심체요절

고려의 문학
  • 고려 전기
    • 한문학

공종 때부터 실시한 과거제와 함께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 향가

삼국 시대 이래의 향가도 맥을 이어 왔는데, 광종 때 균여가 지은 보현십원가 11수가 그의 전기인 균여전에 전해지고 있다.

 

  • 무신 집권기

무신의 집권으로 좌절감에 빠진 문신들은 낭반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띤 수필 형식의 책들을 펴냈다.

 

    • 국순전

임순은 국순전에서 술을 의인화하여 현실을 풍자하였다.

 

    • 파한집

이인로는 역대 문인들의 명시들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파한집에서 과거의 명문에 근거한 표현 방식을 강조하였다.

 

    • 이규보와 최자

이들은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하여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 고려 후기
    • 경기 체가

한림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의 작품들은 주로 유교 정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일부 고쳐 한문으로 기록한 패관 문학이 유행하였다. 이규보의 백운소설과 이제현의 역옹패설이 대표적이다.

사물을 의인화하여 일대기로 구성한 이규보의 국선생전과 이곡의 죽부인전 등도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 한시

한시는 이제현, 이곡, 정몽주 등 유학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곡의 시는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 가요

민중 사회에서는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장가 혹은 속요라는 가요가 유행하였다. 청산별곡, 가시리, 쌍화점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서민의 생활 감정을 대담하고 자유 분방한 형식으로 드러냈다.

고려
청자와 공예
고려자기는 신라와 발해의 전통과 기술을 토대로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귀족 사회의 전성기인 11세기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자기 중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비취색이 나는 고려청자인데, 중국인도 천하의 명품으로 손꼽았다.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 기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 기법은 표면에 무늬를 파내고 그 홈에 다른 재료를 채워 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공예 기법이다.

상감청자

고려 참외모양 병

청자 동화 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청자 투각 칠보문 뚜껑 향로

 

  •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하였다.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나타내는 나전 칠기 공예가 크게 발달하였다.

나전 국화 넝쿨무늬 합

고려
건축과 조각
  • 궁궐

개성 만월대

개성 만월대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면서 건물을 치장하는 장치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짜여져 있는 건축 양식.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짜여져 있는 건물. 웅장한 지붕이나 건물을 화려하게 꾸밀 때에 쓰였음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 석탑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 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경천사지 십층 석탑은 원의 영향을 받았다.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은 송의 영향을 받았다. 청동으로 만든 풍경과 금동 머리 장식이 있다.

경천사지 십층 석탑

월정사 팔각 9층 석탑

현화사 7층 석탑

개심사지 5층 석탑

 

  • 승탑

고달사지 승탑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법천사지 지광국사 탑비

 

  • 불상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 좌상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 보살 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 이불 입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금동 관음보살 좌상

고려 그림
  • 불화 – 고려 후기 왕실과 권문세족의 구복적 요구에 따라 불화가 많이 그려졌다. 그 내용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불도와 지장보살도 및 관음보살도가 많았다. 일본에 전해 오고 있는 혜허가 그린 관음보살도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수월관음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핵심 개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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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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