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정치
| 조선의 건국 |
고려 말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년)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역성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우왕과 최영을 몰아 내고 실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1391년)을 실시하였다.
신흥 무인 세력과 급진 개혁파는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13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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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조 |
새 왕조를 세운 세력은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
태조는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다.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 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괄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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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종 |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 공신 세력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태종은 도평의사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두면서 그 정치적 권한을 약화시키고, 6조 직계제를 채택하였다.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제도)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사병을 없애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다. 태종 13년에 전국을 8도(道)로 나누었다. 태종은 양전 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으며, 이를 조세 징수와 군역부과에 활용하였다. 16세 이상 남자에게 발급했다. 거주지와 이름을 적었다.
태종 때에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태종 때에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였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여,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섬서를 설치하여 저화를 발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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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 |
집현전 학사는 학문 연구와 아울러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를 자문하였다. 이 기능은 뒤에 홍문관으로 이어졌다.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1419년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3포 개항 이후 세종 25년(1443년)에 계해약조를 맺어 쓰시마 도주에게 세사미두 200석, 세견선 50척을 허용해 주었다. 대마도체찰사로 쓰시마섬(대마도)에 파견된 이예는 쓰시마 도주 종정성과 계해약조를 체결하였다. 1443년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 반포하였다. 1448년 조선의 표준 한자음을 제정하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동국정운이 편찬되었다.
세종 때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고,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신찬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세종 때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천체 관측기구로 혼천의(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년)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세종 때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세종 때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장영실, 이천 등이 제작하였다.
세종 때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다. 세종 때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최초의 농서로서 중국의 농업 기술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농법을 정리하였다.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는 공법을 실시하였다.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다. 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에 대해 고소를 금지하는 부민고소금지법을 시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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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조 | ||||
| 조선 성종 | ||||
| 조선 연산군 | ||||
| 조선 중종 |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이 일어났다.
연산군이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청렴함과 원리 원칙에 충실한 태도는 남곤⋅심정 등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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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명종 |
조선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이후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윤원형)의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결국 윤임이 제거당하는 을사사화가 발생했다(1545년).
1547년 조선 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을사사화(1545년)에서 제거되었던 ‘대윤’ 윤임의 남은 관련자들이 제거되었다. 이를 정미사화라고 한다.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였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1556년 명종 때 직전법이 폐지되어 수조권 지급 제도가 없어졌다.
조선 명종 때 구황촬요를 간행하여 기근에 대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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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선조 |
1589년 조선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 왔다(1592년).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김장생이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한 가례집람을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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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앙 정치 체제 |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관리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으로 구성되었고, 30등급(18품 30계)으로 나뉘었다. 조선의 중앙 관직인 경관직은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에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의정부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통치 기관이었다. 3정승의 합의에 의해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다.
6조는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이었다. 6조는 국가의 행정을 나누어 맡았다. 6조의 판서(장관)들은 행정만을 맡은 것이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에는 의정부의 재상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루어졌다.
3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말한다. 3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이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3사의 기능 강화는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사헌부는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 잡았다. 또한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등을 관장했다. 사헌부의 수장은 대사헌이다. 집의, 장령 등의 관직을 두었다. ‘상대’는 사헌부의 별칭이다.
사간원은 왕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왕에게 간언, 논박. 사간원의 수장은 대사간이다.
홍문관은 왕의 정치 자문과 왕과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술과 정책 문제 등을 토론하는 경연을 담당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옥당’이라고 불렀다.
의금부는 국왕 직속 사법 기구로 반역죄, 강상죄 등과 같은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렸다. 금오(金吾), 조옥(詔獄)라는 별칭이 있었다.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으로, 왕의 곁에서 국정 운영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도승지를 수장으로 좌승지, 우승지 등의 관직을 두었다. 은대(銀臺)라는 별칭이 있었다.
한성부는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다.
춘추관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했다.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였다.
천문, 지리, 기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
사대교린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성균관은 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이었다. 주요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학생들이 학문을 배우던 명륜당 등이 있다. 대사성, 좨주, 직강 등의 관직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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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지방 행정 조직 |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고을의 크기에 따라 지방관의 등급을 조정하고, 작은 군⋅현을 통합하여 전국에 약 330여 개의 군⋅현을 두었다. 군현 아래 면⋅이(里)⋅통을 두었다.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편성하였다. 고려 시대까지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도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거나 포함시켰다.
조선은 수령을 지휘, 감독하고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하여 전국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고, 수시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보내기도 하였다.
조선은 전국의 주민을 국가가 직접 지배하기 위하여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수령은 왕의 대리인으로, 지방의 행정⋅사법⋅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향리는 고려 시대에 비해 지위가 낮아져 수령의 행정 실무를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되었다. 향리는 수령의 지시를 받아 지방 행정의 실무를 맡았으며, 이들은 6방으로 나뉘어 각기 업무를 맡아 처리하였다.
지방의 각 군⋅현에서는 그 곳의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유향소(뒤에 향청)를 운영하였다. 좌수와 별감 등의 향임직을 두었다. 유향소에서는 수시로 향회를 소집하여 지방의 여론을 모으고,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령에 대한 자문과 함께 수령의 비행을 고발하는 등 오늘날의 지방 의회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족(양반)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다. 향청, 향당, 향소청 등으로도 불리었다.
서울에는 경재소를 두고 그 지방 출신의 중앙 고관을 책임자로 하여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 관계를 긴밀하게 하고, 유향소를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관할 유향소 임원의 임명권을 행사하였다. 1603년 경재소가 혁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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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관리 등용 제도 |
조선 시대의 관리는 주로 과거와 음서, 천거를 통하여 선발되었다.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으나, 문과의 경우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
과거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에는 양반의 자제가 주로 응시하고, 무과에는 양반, 향리 및 상민의 자제가, 그리고 잡과에는 중인이 많이 응시하였다.
문과에는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는 식년시의 경우에는 초시에서 각 도의 인구 비례로 뽑고, 2차 시험인 복시에서 33명을 선발한 다음, 왕 앞에서 실시하는 전시에서 순위를 결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야 했으나, 후에는 큰 제한이 없었다.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문과의 예비 시험인 생원시, 진사시를 말한다.
무과도 문과와 같은 절차를 거쳐 치러지는데, 최종 선발 인원은 28명이었다.
기술관을 뽑는 잡과도 3년마다 치러지는데, 분야별로 정원이 있었다.
또, 과거를 거치지 않더라도 고관의 추천을 받아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등용되거나 음서를 통하여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거는 대개 기존의 관리를 대상으로 하였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천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대상도 고려 시대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고, 음서 출신은 문과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관으로 승진하기도 어려웠다.
조선은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하여 상피제를 마련하였다.
조선은 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5품 이하 관리의 등용에는 서경을 거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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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구와 사림 |
훈구 세력은 세조의 집권 이후에 공신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이었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훈구 세력은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하였다. 또한 중앙의 권력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를 장악하려 하였다.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이들은 훈구 세력의 사장적 학풍과는 달리 경학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성리학을 학문의 주류로 삼았다. 16세기에는 사림이 소학과 주자가례의 보급과 실천에 힘쓰면서 이륜행실도와 동몽수지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또한 사림은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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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의 성장과 사화 |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사림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이조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대립으로 사화가 발생하였다.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무오사화(1498년)는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화로, 김일손의 사초에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일이었는데,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선 단종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의 전횡이 심해지자, 3사는 연산군에 대한 간쟁의 수위를 높여 갔고, 대신들 또한 연산군의 실정에 대해 논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결국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와 폐비 윤씨 사건의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1504년).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이 알려져 김굉필 등이 처형되었다.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청렴함과 원리 원칙에 충실한 태도는 남곤⋅심정 등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조선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이후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윤원형)의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결국 윤임이 제거당하는 을사사화가 발생했다(1545년).
1547년 조선 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을사사화(1545년)에서 제거되었던 ‘대윤’ 윤임의 남은 관련자들이 제거되었다. 이를 정미사화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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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붕당의 출현 |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 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또한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 세력은 갈등을 겪었다. 조선 선조 시기 이조 전랑 임명을 둘러싸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였다.
동인은 이황, 조식, 그리고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신진 사림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세를 이루었다. 반면에,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붕당의 모습을 갖추었다. |
조선 전기 대외 관계
| 조선-명 관계 |
조선은 명과는 태조 때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요동 정벌의 준비와 여진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가 유지된 적도 있었지만, 태종 이후 양국 간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조선은 명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을 유지하였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매년 정기적인 하정사·성절사·천추사와 같은 사절과, 부정기적인 사절을 파견하였고, 그 때 문화적,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명에 대한 이와 같은 사대 외교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
| 조선-여진 관계 (4군 6진) |
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펴 나갔다. 우선 태조에 의하여 일찍부터 두만강 지역이 개척되었다. 이어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4군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최윤덕은 여진족 이만주 부대를 정벌하였다.
조선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기 위하여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켰다. 또, 사절의 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하였고,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이 때마다 조선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은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
|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 |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신 접대를 위해 한양에 동평관을 두었다.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세종 때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의 명령에 따라 쓴 견문기이다. |
| 임진왜란 |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지만 패배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지만 패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 사용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된 지역을 수복.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함.
이덕형이 구원병 요청을 위해 명에 청원사로 파견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 방어(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패배시킴(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동래성 전투 – 1592년 5월 탄금대 전투 – 1592년 6월 한산도 대첩 – 1592년 8월 제1차 진주성 전투 – 1592년 10월 평양성 전투(평양 탈환) – 1593년 2월 행주 대첩 – 1593년 3월 명량 대첩 – 1597년 10월 노량 해전 – 1598년 12월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
조선 전기 경제
| 조선 과전법 |
과전법은 공양왕 3년(1391년)에 실시된 토지 제도로, 조선 시대의 기본적인 토지 제도가 되었다. 과전법은 국가의 재정 기반과 조선의 건국에 참여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과전은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죽은 관료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받았던 토지 중 일부를 수신전, 휼양전 등으로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였고,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과전법에서는 과전의 지급을 경기도에 있는 토지로 한정하였다.
과전법에 의해 토지가 세습되자, 새로 관직에 나간 관리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세조 12년(1466년) 직전법으로 바꾸어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과전법의 경우에는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수조권을 가진 양반 관료가 이를 남용하여 과다하게 수취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성종 1(1470년) 때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거두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1556년 직전법이 폐지되어 수조권 지급 제도가 없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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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수취 제도 |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 세종 때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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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경제 활동 |
정부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사직설, 금양잡록 등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다. 양반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노비에게 직접 경작시켰다. 그러나 토지의 규모가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할 수 없으면 그 주변 농민에게 생산량을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을 시켰다.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과 병작 반수제에 입각한 지주제는 16세기에 직전제의 소멸과 함께 더욱 확산되었다. 또한 양반은 간이 수리 시설을 만들고, 중국의 농업 기술을 도입하는 등 농업에 관심이 높았다. 밭농사는 조, 보리, 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으며, 논농사도 남부 지방에서 모내기가 보급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시비법도 발달하여 밑거름과 덧거름을 주게 되면서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지을 수 있었다. 목화 재배도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약초와 과수 재배 등이 확대되었다.
조선은 고려보다 관영 수공업 체제를 잘 정비하였다. 전문적인 기술자를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속하게 하고,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하게 하였다. 민영 수공업자들은 주로 농민을 상대로 농기구 등의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양반의 사치품도 생산하였다.
조선은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다.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다.
시전 상인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다. 세조 시기 평시서로 개칭되었다.
1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릴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나, 일부 장시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정부는 조선 초기에 저화, 조선통보 등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부진하였다. 농민은 화폐로 쌀과 무명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변 국가와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하지만 명과는 사신이 왕래할 때에 하는 공무역과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여진과는 국경 지역에 설치한 무역소를 통하여 교역하였고, 일본과는 동래에 설치한 왜관을 중심으로 무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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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수취 제도의 문란 |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지주 전호제가 발달하여 양반 지주들이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수취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들로 사회적 동요가 심해졌다. 명종 때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임꺽정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공납에서는 중앙 관청의 서리가 공물을 대신 내고 그 대가를 많이 챙기는 방납이라는 폐단이 나타났다. 방납이 증가할수록 농민의 부담도 증가하였다. 공물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이 도망을 하면 그 지역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대신 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유망 농민이 더욱 증가하였다.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공납의 폐단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거두는 수령도 나타났고, 이이와 유성룡 등은 공물을 쌀로 거두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농민 생활이 어려워지고 요역 동원으로 농사에 지장을 가져오자, 농민은 요역 동원을 기피하였다. 이에, 농민 대신에 군인을 왕릉 축조, 성곽 보수 등 각종 토목 공사에 동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인도 이런 힘든 군역을 기피하였다.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관청이나 군대에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사람에게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와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이 불법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군포 징수제가 점차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군포 부담의 과중과 군역 기피 현상으로 도망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적도 부실해졌다. 각 군현에서는 정해진 액수를 맞추기 위해서 남아 있는 사람에게 그 부족한 군포를 부담시키자, 남은 농민도 생활이 더욱 어려워 졌다.
환곡제는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곤궁한 농민에게 곡물을 빌려주고 10분의 1 정도의 이자를 거두는 제도였다. 그러나 지방 수령과 향리들은 정한 이자보다 많이 거두어 사적으로 사용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
조선 전기 사회
| 조선 전기 신분 제도 |
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자유민으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양반은 본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양반 관료 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단 지배층이 된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지배층이 더 이상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들은 문무 양반의 관직을 받은 자만 사족으로 인정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중인은, 넓은 의미로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 계층을 뜻하고, 좁은 의미로는 기술관만을 의미한다.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청의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직역을 세습하고, 같은 신분 안에서 혼인하였으며, 관청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였다. 중인은 양반에게서 멸시와 하대를 받았으나, 대개 전문 기술이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으므로 나름대로 행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역관은 사신을 수행하면서 무역에 관여하여 이득을 보았으며, 향리는 토착 세력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위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양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으므로 중서라고도 불리었다. 이들은 문과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간혹 무반직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평민, 양인으로도 불리는 상민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 수공업자, 상인을 말한다. 나라에서는 이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지만, 과거 준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으므로 상민이 과거에 응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전쟁이나 비상시에 공을 세우는 등의 경우가 아니면 상민의 신분 상승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농민은 조세, 공납, 부역 등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세는 때에 따라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과중하였다. 수공업자는 공장으로 불리며, 관영이나 민영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상인은 시전 상인과 행상 등이 있었는데,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상거래에 종사하였다. 조선은 농본억상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상인은 농민보다 아래에 위치하였다. 한편, 양인 중에도 천역을 담당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을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천민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비였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므로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일 때, 그 소생 자녀도 자연히 노비가 되는 제도가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 시대 노비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가 있었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함께 사는 솔거 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사는 외거 노비가 있었다. 외거 노비는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신공을 바쳤다. 공노비는 국가에 신공을 바치거나 관청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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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사회 정책과 법률 제도 |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실시하여 농민의 안정을 꾀하였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번기에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종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는 조세를 덜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이 자주 어려움을 당하자, 국가에서는 의창,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실시하여 이들을 구제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자치적으로 실시된 사창 제도는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료 시설로는 혜민국, 동⋅서 대비원, 제생원, 동⋅서 활인서 등이 있었다. 혜민국과 동⋅서 대비원은 수도권 안에 거주하는 서민 환자의 구제와 약재 판매를 담당하였고, 제생원은 지방민의 구호 및 진료를 담당하였다. 동⋅서 활인서는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을 담당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관습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 고려 시대와 달리, 경국대전과 대명률로 대표되는 법전에 의해 형벌과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율하였다. 이 중에서 형벌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대명률의 적용을 받았다. 범죄 중에서 가장 무겁게 취급된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이 같은 범죄에는 범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처자까지도 함께 처벌하는 연좌제가 시행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범죄가 발생한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고, 고을의 수령은 낮은 근무 성적을 받거나 파면되기도 하였다.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종이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의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는 관리의 잘못이나 중대한 사건을 재판하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그리고 노비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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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향촌 사회 |
향촌 자치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유향소였다.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였다. 경재소는 중앙 정부가 현직 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제도로서,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관할 유향소 임원의 임명권을 행사하였다.
군, 현 아래 면, 이(里)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몇 개의 자연 촌락으로 구성되었다. 면, 이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았다.
촌락은 농민 생활의 기본 단위일 뿐만 아니라 향촌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자연촌으로 존재하면서 동(洞), 이(里)로 편제된 조직이다.
정부는 조선 초기에 자연촌 단위의 몇 개의 이(里)를 면으로 묶은 면리제를 통해, 그리고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가작통제를 통하여 촌락 주민에 대한 지배를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오가작통제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여기에 통수를 두어 통 내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촌락의 농민 조직으로 두레와 향도가 있었다. 두레는 공동 노동의 작업 공동체였다. 향도는 불교와 민간 신앙 등의 신앙적 기반과 동계 조직 같은 공동체 조직의 성격을 모두 띠었다. 주로 상을 당하였을 때에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다.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두꾼도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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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향약과 서원 |
지방 사족은 향촌 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향약 조직을 만들었다. 향약은 조선 중종 때 조광조가 처음 시행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본래 향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 풍습이 있었다. 향약은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여 교화 및 질서 유지에 알맞게 구성한 것이다. 향약은 조선 사회의 풍속 교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향촌 사회의 질서 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는 등 향촌의 자치 기능을 맡았다. 향약의 보급으로 지방 사림의 지위는 강화되었으나, 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백운동 서원은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고 이황의 건의로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조선 명종 때 사액을 받아 소수 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6세기 이후 각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서원도 향약과 함께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서원은 유교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사림을 결집,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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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교육 기관 |
조선은 고려의 교육 제도를 이어받아 서울에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는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다. 주요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학생들이 학문을 배우던 명륜당 등이 있다. 대사성, 좨주, 직강 등의 관직이 있었다.
4학은 중앙의 중등 교육 기관이었다. 4학은 중학, 동학, 남학, 서학이 있었다.
향교는 지방의 중등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는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목⋅군⋅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되었다.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서당은 초등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교육 기관으로서,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교육을 받았다. 교육받는 자의 연령은 대개 8, 9세부터 15, 16세 정도에 이르렀다.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서원에서는 봄⋅가을로 향음 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다. 백운동 서원은 조선 명종 때 사액을 받아 소수 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조선 전기 문화
| 조선 전기 성리학의 발달 |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황은 기대승과 사단 칠정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해주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공물을 쌀로 받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대동법).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1589년 조선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광해군 때,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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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창제 |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다(1446년).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으며, 자기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를 만드는 원리가 매우 과학적인 뛰어난 문자이다.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이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
조선 정부는 한글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왕실 조상의 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어 한글로 간행하였다.
또, 불경, 농서, 윤리서, 병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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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역사서 편찬 |
조선 시대에는 실록의 편찬을 매우 중요시하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한 왕대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실록의 편찬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기록 문화 유산이다.
15세기 중엽에 기전체의 <고려사>(세종)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문종)가 완성되었다.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고려사>는 <고려국사>를 계승하여 고려시대의 역사를 재정리했다.
우리 나라의 전체 역사를 편찬하려는 노력도 계속되어 성종 때에 동국통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로서,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역사서로 박상의 동국사략 등이 편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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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지리서 편찬 |
조선 초기에 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에 힘썼다.
태종 때에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에 현존하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세계 지도 중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이회, 이무, 김사형 등이 제작에 관여하였다. 아라비아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만든 원나라의 세계지도에 한반도의 지도를 덧붙인 것이다. 유럽, 아프리카, 한반도, 중국, 일본 등이 그려져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은 빠져 있다.
세종 때에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다.
세조 때에 양성지 등이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다.
16세기에 많은 지도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조선방역지도가 현존하고 있다. 만주와 대마도를 포함하고 있어 당시 영토의식을 엿볼 수 있다.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세종 때 신찬팔도지리지,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때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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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윤리·의례서와 법전의 편찬 |
윤리·의례서
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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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불교·도교·민간 신앙 |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 불교계는 크게 위축되었다. 태조 때,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고자 하는 출가를 제한하였다.
세종 때에는 교단을 정리하면서 선종과 교종 두 종파에 모두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세조 때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보급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 진흥책을 펴서 일시적으로 불교가 중흥되기도 하였다.
성종 이후 사림의 적극적인 비판으로 불교는 점차 왕실에서 멀어져 산간 불교로 바뀌었다.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의 지원 아래 일시적인 불교 회복 정책이 펼쳐진 결과, 보우(普雨)가 중용되고 승과가 부활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 휴정(서산대사)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어 교리를 가다듬었고, 임진왜란 때 승병이 크게 활약함으로써 불교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도교는 크게 위축되어 사원이 정리되고 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제천 행사가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점이 인정되어 소격서를 설치하고, 참성단에서 일월성신에 제사 지내는 초제가 시행되었다.
한편, 풍수지리설과 도참 사상이 조선 초기 이래로 중요시되어 한양 천도에 반영되었으며, 양반 사대부의 묘지 선정에도 작용하였다.
무격 신앙, 산신 신앙, 삼신 숭배, 촌락제 등은 백성 사이에 깊이 자리잡았다. 특히, 계절에 따른 세시 풍속은 유교 이념과 융합되면서 조상 숭배 의식과 촌락의 안정을 기원하는 의식이 되었다. 불교식으로 화장하던 풍습이 묘지를 쓰는 것으로 바뀌면서 명당 선호 경향이 두드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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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천문, 역법과 의학 |
세종 때 천체 관측기구로 혼천의(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다.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년)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다.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천문도를 만들었다. 태조 때에는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겼다.
천문학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역법이 마련되었다. 세종 때에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다. 이는 15세기 세계 과학의 첨단 수준에 해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의 7개의 운동하는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서술한 역법서
의학에서도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세종 때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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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농서 편찬 |
세종 때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최초의 농서로서 중국의 농업 기술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농법을 정리하였다. 우리 현실에 맞는 농법을 개량하고 보급할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성종 때 강희맹은 금양(시흥)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방의 농사법을 정리하여 금양잡록을 편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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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건축 |
건국 초기에 도성을 건설하고, 경복궁을 지었으며, 곧이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세웠다. 지금까지 서울에 남아 있는 창경궁 명정전과 숭례문, 창덕궁 돈화문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은 검박하고 단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당시의 과학과 기술을 집약하고 있다. 세조 때에 대리석으로 만든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이 시기 석탑의 대표작이다.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의 진출과 함께 서원의 건축이 활발해졌다. 서원 건축은 가람 배치 양식과 주택 양식이 실용적으로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주위의 자연과 빼어난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경주의 옥산 서원과 안동의 도산 서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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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분청사기, 백자와 공예 |
고려 말에 나타난 분청사기는 청자에 백토의 분을 칠한 것으로, 안정된 그릇 모양과 소박하고 천진스러운 무늬가 어우러져 정형화되지 않으면서 구김살 없는 우리의 멋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도자기였지만 16세기부터 세련된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점차 그 생산이 줄어들었다.
조선의 백자는 청자보다 깨끗하고 담백하며 순백의 고상함을 풍겨 선비의 취향과 어울렸기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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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그림과 글씨 |
화원 출신인 안견은 역대 화가들의 기법을 체득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몽유도원도는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환상적인 이상 세계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대각선적인 운동감을 활용하여 구현한 걸작이다.
문인 화가인 강희안은 시적 정서가 흐르는 낭만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대표작인 고사관수도는 간결하고 과감한 필치로 인물의 내면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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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음악 |
세종은 박연에게 악기를 개량하거나 만들게 하였고, 스스로 여민락 등 악곡을 짓고 소리의 장단과 높낮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정간보를 창안하였다. 아울러 악곡과 악보를 정리하게 하고 아악을 체계화함으로써 아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성종 때에 성현은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음악의 원리와 역사, 악기, 무용, 의상 및 소도구까지 망라하여 정리함으로써 전통 음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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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문학 |
조선 시대에 많은 한시와 문집이 만들어졌는데, ‘동문선’은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삼국 시대 이래의 유명한 시문을 뽑아 엮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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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핵심 개념 정리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1 – 선사 시대와 고대 국가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2 – 삼국~ 남북국시대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3 – 후삼국~고려시대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4 – 조선 전기
한국사 시험 모음
- 연표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1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1점 문제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고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중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초급
- 한국사 공무원 시험
- 한국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연표
- 선사 ~ 고조선 역사 연표
- 삼국 시대 역사 연표
- 통일 신라 발해 남북국 시대 역사 연표
- 후삼국·고려 시대 역사 연표
- 조선 전기 역사 연표
- 조선 후기 역사 연표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
- 일제 강점기 역사 연표
- 현대사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