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학평 고1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1번 기출 해설

문제

11.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3점]

OO 고등학교 1학년 한국사 중간고사

[서술형] 다음 자료를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 고려는 중서문하성의 일부 관리와 어사대로 하여금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며 국왕의 잘못된 정치 행위를 비판하고, 사회 풍속을 감시하게 하였다.
  • 조선의 사헌부는 관리의 잘못을 감찰하였고, 사간원은 국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일깨웠으며 홍문관은 정책 자문과 경연을 담당하였다.

1. 자료에 나타난 통치 체제의 공통된 목적을 서술하시오.

고려와 조선은              (가)                

① 빈민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②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③ 북방으로 영토를 넓히고자 하였다.

④ 정치권력의 균형을 잡고자 하였다.

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출처: EBSi 홈페이지

문제 해설

고려의 낭사(중서문하성 관원 일부)와 어사대, 조선의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론 활동은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고위 관리는 물론 국왕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정치권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① 빈민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고려 시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기구로는 의창, 상평창, 동⋅서 대비원, 구제도감·구급도감, 제위보 등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도 의창, 상평창, 동⋅서 활인서 등이 있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북방으로 영토를 넓히고자 하였다.

고려 시대 윤관은 별무반을 설치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 9성을 설치했으며, 조선 시대 세종은 김종서 등으로 하여금 4군 6진을 개척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정치권력의 균형을 잡고자 하였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고려
중앙 정치 조직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중서문하성

  • 중서문하성은 고려의 최고 관서로서,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 중서문하성은 재신과 낭사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국가의 정책을 심의하고, 낭사는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 낭사는 어사대의 관원과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 재신은 중추원의 추밀과 함께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의 구성원이었다.

 

상서성

  •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 6부 – 6부에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가 소속되어 있었다.

 

중추원

  • 송의 제도를 본따 만든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 군사 기밀을 담당하면서 재신과 함께 국정을 총괄하는 추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선으로 구성되었다.
  • 추밀은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함께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의 구성원이었다.

 

삼사

  • 삼사는 송나라와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맡았다.

 

어사대

  •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대간

  • 대간은 어사대의 관원과 중서문하성의 낭사로 구성된다.
  •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지고 있었다.

 

도병마사

  • 도병마사는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관청으로,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 도병마사는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였으나,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도당)로 개편되면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 사항을 담당하는 최고 정무 기구로 발전하였다.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또한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식목도감

  • 식목도감는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관청으로,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었다.
  • 식목도감은 임시 기구로서 국내 정치에 관한 법의 제정이나 각종 시행 규정을 다루던 회의 기구였다.
  •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또한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조선
중앙 정치 체제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관리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으로 구성되었고, 30등급(18품 30계)으로 나뉘었다.

조선의 중앙 관직인 경관직은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에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 의정부

의정부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통치 기관이었다.

3정승의 합의에 의해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다.

 

  • 6조

6조는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이었다.

6조는 국가의 행정을 나누어 맡았다.

6조의 판서(장관)들은 행정만을 맡은 것이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에는 의정부의 재상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루어졌다.

 

  • 3사

3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말한다.

3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이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3사의 기능 강화는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 3사의 언관

벼슬 등급은 높지 않았으나,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중에 판서나 정승 등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 사헌부

사헌부는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 잡았다.

사헌부의 수장은 대사헌이다.

 

  • 사간원

사간원은 왕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왕에게 간언, 논박.

사간원의 수장은 대사간이다.

 

  • 홍문관

홍문관은 왕의 정치 자문과 왕명의 대필을 맡았다.

또한 국왕과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술과 정책 문제 등을 토론하는 경연을 담당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옥당’이라고 불렀다.

 

  •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와 함께 3사라고 했던 기관으로, 국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옥당’이라고도 한다.

 

  • 의금부

의금부는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렸다.

 

  • 승정원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으로, 왕의 곁에서 국정 운영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은대(銀臺)라는 별칭이 있었다.

 

  • 한성부

한성부는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다.

 

  • 춘추관

춘추관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했다.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 승무원

사대교린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 성균관

성균관은 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이었다.

주요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학생들이 학문을 배우던 명륜당 등이 있다.

고려
백성의 생활 모습
  • 향도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香徒)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이다.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 의창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 상평창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었다.

풍년에는 곡물을 사들이고 흉년에는 곡물을 풀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 동⋅서 대비원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다.

 

  • 혜민국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하게 하였다.

 

  • 구제도감·구급도감

각종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 제위보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 혼인과 여성의 지위

고려 시대에는 여자는 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에 혼인을 하였다.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하였다. 중기 이후 여러 번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 여성의 지위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조선 전기
사회 정책과
법률 제도
  • 사회 정책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본 정책을 실시하여 농민의 안정을 꾀하였다. 국가는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번기에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사회 제도
    • 농민 안정책

각종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는 조세를 덜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책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생활이 자주 어려움을 당하자, 국가에서는 의창, 상평창 등을 설치하고 환곡제를 실시하여 이들을 구제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자치적으로 실시된 사창 제도는 양반 지주들이 향촌의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 의료 시설

의료 시설로는 혜민국, 동⋅서 대비원, 제생원, 동⋅서 활인서 등이 있었다. 혜민국과 동⋅서 대비원은 수도권 안에 거주하는 서민 환자의 구제와 약재 판매를 담당하였고, 제생원은 지방민의 구호 및 진료를 담당하였다. 동⋅서 활인서는 유랑자의 수용과 구휼을 담당하였다.

 

    • 법률 제도

조선 시대에는 관습법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 고려 시대와 달리, 경국대전과 대명률로 대표되는 법전에 의해 형벌과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율하였다. 이 중에서 형벌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대명률의 적용을 받았다.

범죄 중에서 가장 무겁게 취급된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이 같은 범죄에는 범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처자까지도 함께 처벌하는 연좌제가 시행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범죄가 발생한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고, 고을의 수령은 낮은 근무 성적을 받거나 파면되기도 하였다.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종이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의 사법 기관은 행정 기관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중앙에는 관리의 잘못이나 중대한 사건을 재판하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그리고 노비에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장례원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관할 구역 내의 사법권을 가졌다.

독립 협회
  • 배경 – 아관파천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 열강의 이권 침탈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독립 협회 창립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년).

  • 독립 협회 활동
    •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 협회는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 자주 국권 운동
    • 만민 공동회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다.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 등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년).

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다.

 

  • 자주 민권 운동
    • 국민 참정권 운동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 자강 개혁 운동
    • 관민 공동회

1898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천인 출신인 백정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 헌의 6조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 중추원 관제 반포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독립 협회의 해산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황국 협회(皇國協會)

전국의 보부상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보수 세력은 이들에게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게 한 다음, 이를 빌미로 독립 협회를 해산하였다.

 

  • 독립 협회의 의의

독립 협회의 활동은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고려
여진 정벌
숙종 때 윤관의 지휘 아래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자,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

별무반 –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

1107년, 예종 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면 지역에 동북 9성을 설치

1115년, 강성해진 여진족은 금을 건국. 금은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고,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임

조선-여진 관계
(4군 6진)
  • 4군 6진

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펴 나갔다.

우선 태조에 의하여 일찍부터 두만강 지역이 개척되었다.

이어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 회유책

조선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기 위하여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켰다.

또, 사절의 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하였고,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 토벌 정책

그러나 이러한 교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이 때마다 조선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다.

 

  • 사민 정책

이와 함께 조선은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의 탕평 정치
  • 탕평 정치 실시. 탕평책.

탕평비

  • 탕평비 설치
  • 산림 존재 불인정
  • 서원 대폭 정리
  • 이조 전랑 권한 약화
  • 균역법 시행
  •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편찬
  • 신문고 부활

 

기출 문제 키워드

 

2026학년도 3월 고1 학평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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