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학평 고2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0번 기출 해설

문제

10. (가)의 결과로 옳은 것은? [3점]

발신 : 츠즈키 대사

수신 : 하야시 외무대신

오늘 <평화회의보>에는 이상설 외 2명이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 문서가 게재되었습니다. 그 문서에는 일본이 강제로 (가)을/를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였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위 한국인들이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① 삼별초가 조직되었다.

②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③ 척화비가 건립되었다.

④ 북벌론이 대두되었다.

⑤ 삼국 간섭이 일어났다.

 

출처: EBSi 홈페이지

문제 해설

1905년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순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① 삼별초가 조직되었다.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기 최우가 조직한 군사 조직이다. 고려 정부가 개경 환도를 한 후에도 끝까지 대몽 항쟁을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을사늑약의 결과로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척화비가 건립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했다(1871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북벌론이 대두되었다.

조선 인조 시기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삼국 간섭이 일어났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삼국 간섭).

그 결과 일본은 청에게 할양 받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일제의
국권 피탈
  • 제1차 영·일 동맹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이후, 러시아가 압록강에 위치한 용암포를 강제로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 전시 국외 중립 선언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조짐을 보이자 대한 제국은 ‘전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 러·일 전쟁 발발(1904년 2월)

인천항과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 한⋅일 의정서(1904년 2월)

러·일 전쟁 발생 직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였다.

 

  •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 방안을 확정하고, 이어서 제1차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와 재정 분야에 그들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일본은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일본이 뤼순항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등 전쟁의 승기를 잡자,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제2조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또한 한국에 있는 러시아 제국 신민은 다른 외국인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러시아는 한국 영토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동의한다.

 

  •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1905년 11월)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 헤이그 특사 파견과 고종의 강제 퇴위

일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년 7월)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

협약 내용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한국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용빙할 수 없다.

 

  • 기유각서

일본은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았고, 1910년 경찰권을 빼앗았다.

 

  • 한⋅일 병합 조약(경술국치, 1910년 8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왔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고려
몽골의 침입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

몽골의 1차 침입 –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킴

몽골의 2차 침입 –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

몽골의 5차 침입 –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

피해 –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

개경 환도 –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 종결. 1270년,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항쟁 –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듦.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전투

삼별초

최우가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으로 구성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정묘호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 병자호란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 북벌 운동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나선 정벌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
  • 배경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청일 상인에 의해 영국산 면직물이 싼값에 들어오면서 면포를 짜서 팔던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이 늘어 곡물 가격이 오르자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커졌다.

개화 정책으로 늘어난 정부의 재정 지출은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졌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 동학의 교세 확장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포접제

동학은 마을이나 군 단위로 접을 조직하고 수십 개의 접을 포로 묶어 포교의 기초 조직으로 삼았다. 접의 책임자는 접주, 포의 책임자는 대접주라고 불렀다

 

  • 동학의 교조 신원 운동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지방관들은 동학을 탄압하였고 농민들에게 동학 교도의 누명을 씌워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동학교도들은 1892년부터 충청도 공주, 전라도 삼례, 한성 등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 삼례 집회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 서울 집회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다.

 

  • 보은 집회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 고부 농민 봉기(1894년 1월)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횡포와 착취를 저지르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세력을 모았다.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에 정부가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자 농민들은 군수의 다짐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 제1차 농민 봉기(1894년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이고 탄압하자 농민들의 분노가 다시 거세졌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무장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 백산 봉기

이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나서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라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를 담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백성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4대 강령을 발표했다.

 

  • 황토현 전투
  • 황룡촌(전남 장성) 전투: 농민군이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을 격파했다.
  • 전주성 점령

 

  • 전주 화약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주 화약이라고 한다.

 

  • 집강소 설치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집강소

전라도 지역 53개 고을의 치안 유지와 행정 사무를 담당하게 한 자치 기구이다.

폐정 개혁 12개조

1. 도인(道人)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 청⋅일 전쟁(1894년)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마침내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 경복궁 점령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하였다(군국기무처 설치).

 

  • 시모노세키 조약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1895년).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 삼국 간섭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청에게 할양 받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다.

 

  • 제2차 농민 봉기(1894년 9월)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 우금치 전투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결국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봉건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여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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