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학년도 6월 모의고사 한국사 14번 해설 – 3.1 운동

14번 문제

14. 다음 자료에 나타난 민족 운동이 끼친 영향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3점]

①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②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③ 정동행성 이문소가 폐지되었다.

④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⑤ 영남 지역의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1919년 1월에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고,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 인사들은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하고,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최남선이 작성하고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3⋅1 독립 선언서(기미 독립 선언문)를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서울과 지방의 여러 도시에 몰래 배포하였다.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후, 거리에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만세 시위를 벌였다(3⋅1 운동).

 

①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1895년 청일 전쟁 후 삼국 간섭 등으로 박영효가 실각한 뒤,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은 낭인을 동원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정동행성 이문소가 폐지되었다.

고려 공민왕이 원 간섭기의 설치된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민주공화제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영남 지역의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다.

1880년대 들어 개화 정책이 실시되고 <조선책략>이 퍼지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 및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개화 반대 운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3⋅1 운동
  • 국제 정세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이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제시했다.

민족 자결주의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 국외 독립 선언 및 활동

1917년 7월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조소앙 등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주권론을 제기하며 새로운 임시정부 결성의 필요성을 제의・제창한 최초의 선언문이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는 국외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 39인이 무오 독립 선언서(대한 독립 선언)를 발표하여 일제에 대한 육탄 혈전을 결의하였다.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 2. 8.).

 

  • 고종의 죽음

1919년 1월에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고,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 3⋅1 독립 선언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 인사들은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하고,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최남선이 작성하고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3⋅1 독립 선언서(기미 독립 선언문)를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서울과 지방의 여러 도시에 몰래 배포하였다.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후, 거리에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오등(吾等)은 자(自)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告)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告)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금일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3⋅1독립 선언서-

 

  • 확산

서울, 평양, 원산, 의주 등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참여한 계층도 학생, 농민, 노동차, 상인, 교사 등 다양하였다.

3월 중순을 지나면서 만세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만세 시위는 점차 무력 저항 운동으로 바뀌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군청, 면사무소, 헌병 경찰 주재소 등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으며, 수탈에 가담한 일본인 지주 등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만세 시위는 국외로도 확산되었다. 간도와 연해주, 하와이 등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은 거의 어디에서나 일어났다.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국내의 3⋅1 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곧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를 벌였다.

 

  • 일제의 탄압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보복성 학살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린 나이로 충청남도 천안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유관순은 구속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 3⋅1 운동의 의의 및 영향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어, 일제는 폭력적인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민주공화제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가 높아지면서 무장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3⋅1 운동은 중국의 5⋅4 운동 등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을미개혁
  • 을미사변(1895년)

삼국 간섭 등으로 박영효가 실각한 뒤,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은 낭인을 동원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 제4차 김홍집 내각

을미사변 후 친일 성향의 제 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을미개혁이 추진되었다.

 

  • 주요 개혁 내용
    • 정치
      • ‘건양’ 연호를 사용
    • 사회
      • 태양력 사용
      • 종두법 실시
      • 단발령 실시
      • 소학교 설치
      • 우체사 설치
    • 군사
      • 친위대와 진위대 설치

 

  • 중단
    • 을미의병

개항 이후 계속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 아관파천

1896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을미의병과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일제의
무단 통치

  • 1910년 ~ 1919년

 

  • 조선 총독부

국권 강탈 이후, 일제는 식민 통치의 중추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한민족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를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 현역 대장이 조선 총독으로 임명되어 식민 통치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조선 총독은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 중추원

조선 총독부는 자문 기구로 중추원을 두어 한국인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이는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 헌병 경찰 통치

일제는 한반도에는 일본군 2개 사단과 2만여 명의 헌병 경찰 및 헌병 보조원을 배치하여 강력한 헌병 경찰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 통치를 통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 지도자들은 체포, 투옥, 학살당하였다.

또, 일반 관리는 물론 학교 교원들에게까지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하였던 것은 위협적인 헌병 경찰 통치의 한 수단이었다.

 

  • 즉결 처분권

일제는 헌병 경찰에게 사소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조선 태형령 1912년)에 처하기도 하였다.

조선 태형령(1912)

제11조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리에 행한다.

제13조 본령은 조선인에 한하여 적용한다.

 

  • 민족 언론 탄압

1910년대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 제1차 조선 교육령(1911년)

일제는 제1차 조선 교육령을 발표하여 한국인의 교육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 중심으로 편성하여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였다. 또한 민족 교육을 강조하던 사립 학교를 탄압하였다.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규정하였다.

1918년 일제는 <서당 규칙>을 통해 서당 설립을 인가제(허가제)로 바꾸었다.

 

  • 105인 사건(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고려
공민왕
  •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
  •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며, 몽골 풍속을 금지
  •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 쌍성총관부 공격, 철령 이북의 땅 수복
  • 정방 폐지
  • 승려 신돈 등용
  • 전민변정도감 설치 –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을 양민으로 해방
  • 성균관 개편
  •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멀리 안동(복주)까지 피란
  •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 받음
위정척사
운동
  • 위정척사 운동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 1860년대

1860년대 천주교가 퍼지고 서구 열강이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자 유생들은 통상에 반대하였다. 이항로, 기정진 등은 척화 주전론을 내세우며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지지하였다.

 

  • 1870년대

1870년대 강화도 조약의 체결 무렵에는 최익현 등이 왜양일체론을 내세우며 일본의 개항 요구에 반대하였다(개항 반대 운동).

 

  • 1880년대

1880년대 들어 개화 정책이 실시되고 <조선책략>이 퍼지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 및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개화 반대 운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와서 유포한 사사로운 책자를 보노라면 어느새 털끝이 일어서고 쓸개가 떨리며 울음이 북받치고 눈물이 흐릅니다.…

청은 우리가 신하로서 섬기는 바이며 해마다 옥과 비단을 보내는 수레가 요동과 계주를 이었습니다. 신의와 절도를 지키고 속방의 직분을 충실히 지킨 지 벌써 2백년이나 되었습니다. …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데 공연히 타인의 권유로 불러들였다가 그들이 재물을 요구하고 우리의 약점을 알아차려 어려운 청을 하거나 과도한 경우를 떠맡긴다면 장차 이에 어떻게 응할 것입니까?

일본은 우리에게 매어있던 나라입니다. … 그들은 이미 우리 땅을 잘알고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함부로 쳐들어오면 장차 이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말만 듣고 틈이 생기게 된다면 우리의 위신이 손상될 뿐만 아니라 만약 이를 구실로 침략해 온다면 장차 이를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 영남만인소 중에서 –

  • 1890년대

반외세·반침략의 성격을 띤 위정척사 운동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유인석은 을미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7학년도(2026) 6월 모의평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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