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학년도 6월 모의고사 한국사 8번 해설 – 을사늑약

8번 문제

8. (가)의 결과로 옳은 것은? [3점]

① 별기군이 창설되었다.

②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③ 아관 파천이 단행되었다.

④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⑤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1905년 11월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일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① 별기군이 창설되었다.

1880년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별기군이 창설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을사늑약 후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아관 파천이 단행되었다.

1896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862년 철종 때 진주에서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고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다.

1950년 9월 15일, 6.25 전쟁 과정에서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일제의
국권 피탈
  • 제1차 영·일 동맹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이후, 1903년 러시아가 압록강에 위치한 용암포를 강제로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 전시 국외 중립 선언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조짐을 보이자 대한 제국은 ‘전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 러·일 전쟁 발발(1904년 2월)

인천항과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 한⋅일 의정서(1904년 2월)

러·일 전쟁 발생 직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 소속으로 고시하였다.

 

  •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 방안을 확정하고, 이어서 제1차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와 재정 분야에 그들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일본은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일본이 뤼순항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등 전쟁의 승기를 잡자,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제2조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또한 한국에 있는 러시아 제국 신민은 다른 외국인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러시아는 한국 영토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동의한다.

 

  •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1905년 11월)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 헤이그 특사 파견과 고종의 강제 퇴위(1907년)

일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은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바꿨다.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년 7월)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

협약 내용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한국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용빙할 수 없다.

 

  • 기유각서

일제는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았고, 1910년 경찰권을 빼앗았다.

 

  • 한⋅일 병합 조약(경술국치, 1910년 8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왔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을미개혁
  • 을미사변(1895년)

삼국 간섭 등으로 박영효가 실각한 뒤,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은 낭인을 동원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 제4차 김홍집 내각

을미사변 후 친일 성향의 제 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을미개혁이 추진되었다.

 

  • 주요 개혁 내용
    • 정치
      • ‘건양’ 연호를 사용
    • 사회
      • 태양력 사용
      • 종두법 실시
      • 단발령 실시
      • 소학교 설치
      • 우체사 설치
    • 군사
      • 친위대와 진위대 설치

 

  • 중단
    • 을미의병

개항 이후 계속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 아관파천

1896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을미의병과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1862년 철종 때 진주에서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고 한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 삼정이정청 설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6⋅25 전쟁
  • 배경
    • 미국·소련 군대 철수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 38도선 무력 충돌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 중국의 공산화 및 중·소의 북한 지원

1949년 10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공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중국은 물론 소련에서도 군사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 6⋅25 전쟁 전개
    •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 유엔군의 참전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동시에 북한군의 전력 분산을 위한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1950년 11월 1일, 국군∙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최대로 북진하였다.

 

    • 중공군 참전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 후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고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 1·4후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전세는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 국민 보도 연맹 학살 사건

6·25전쟁이 발발하자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인 국민 보도 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 정전 협정
      • 소련의 정전 제안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국제 연합(UN)에 정전을 제안하였다.

 

      • 정전 회담 쟁점

정전 회담의 주요 쟁점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했다.

 

      • 반공 포로 석방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2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정전 회담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미국, 북한, 중국이다.

휴전협정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년).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개화 정책의
추진
  • 통리기무아문 설치

개항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을 두고 침략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정책을 전담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1880년).

그 아래에 12사를 두어 외교, 군사, 산업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하지만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었다(1882년).

 

  • 군사 제도 개편
    • 2영

기존의 5군영을 무위영, 장어영의 2영으로 통합, 개편하였다.

 

    • 별기군 창설

신식 군대의 양성을 위하여 별도로 별기군을 창설하였고, 일본인 교관을 채용하여 근대적 군사 훈련을 시키고, 사관 생도를 양성하였다.

 

  • 근대 시설

기기창(1883년, 무기 제조 기관), 박문국(1883년, 인쇄, 출판 기관, 한성순보 발행), 전환국(1883년, 화폐 발행 기관) 등의 근대 시설을 세웠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7학년도(2026) 6월 모의평가 한국사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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