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학년도 9월 모의고사 한국사 11번 해설

11번 문제

11. 밑줄 친 ‘이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이 자료는 경남의 한 지역에서 작성된 의연금 모집 취지문으로,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진 빚 1,300만 원을 2천만 백성이 담배를 끊고 1원씩 마련하여 갚자는 글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오른쪽은 국한문, 왼쪽은 순한글로 작성하여 이 운동에 각계각층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① 대한매일신보의 지원을 받았다.

② 순종의 장례일을 기해 일어났다.

③ 집강소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④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에 반대하였다.

⑤ 우리말(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서상돈, 김광제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① 대한매일신보의 지원을 받았다.

국채 보상 운동 당시 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 기관은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② 순종의 장례일을 기해 일어났다.

1926년에 발생한 6.10 만세 운동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집강소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1894년에 발생한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에 반대하였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국에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우익인 민족주의 진영은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신탁 통치 반대 운동(반탁)을 펼쳤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우리말(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①번이다.

 

국채 보상 운동

  • 배경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 국채 보상 운동
    • 전개

1907년 서상돈, 김광제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금연과 금주로 모은 돈과 반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냈으며, 여러 단체와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언론 기관도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 결과

일제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인해 국채 보상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6·10 만세 운동

  • 배경

1920년대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민족 지도자들의 독립 운동이 크게 제약을 받는 가운데 학생들은 강연, 연극, 야학, 농촌 계몽 활동 등을 통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 섰다.

또, 학생들은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고, 일본인 교사의 한국인 멸시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 전개

1926년 4월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 공산당은 학생 단체, 천도교 일부 세력과 힘을 모아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인 6월 10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으나, 학생들은 일제 경찰의 감시를 뚫고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격문을 뿌리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기출 자료

전세계 피압박 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 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000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보통학교 용어는 조선어로!

 

  • 의의

학생 운동이 식민 통치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이 운동을 함께 준비하면서 민족 유일당(민족 협동 전선)을 만들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신간회 창립에 기여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
  • 배경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청일 상인에 의해 영국산 면직물이 싼값에 들어오면서 면포를 짜서 팔던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이 늘어 곡물 가격이 오르자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커졌다.

개화 정책으로 늘어난 정부의 재정 지출은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졌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 동학의 교세 확장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포접제

동학은 마을이나 군 단위로 접을 조직하고 수십 개의 접을 포로 묶어 포교의 기초 조직으로 삼았다. 접의 책임자는 접주, 포의 책임자는 대접주라고 불렀다

 

  • 동학의 교조 신원 운동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지방관들은 동학을 탄압하였고 농민들에게 동학 교도의 누명을 씌워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동학교도들은 1892년부터 충청도 공주, 전라도 삼례, 한성 등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 삼례 집회(1892년)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 서울 집회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다.

 

  • 보은 집회(1893년)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 고부 농민 봉기(1894년 1월)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횡포와 착취를 저지르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세력을 모았다.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에 정부가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자 농민들은 군수의 다짐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 제1차 농민 봉기(1894년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이고 탄압하자 농민들의 분노가 다시 거세졌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무장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 백산 봉기

이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나서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라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를 담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백성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4대 강령을 발표했다.

 

    • 황토현 전투
    • 황룡촌(전남 장성) 전투: 농민군이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을 격파했다.
    • 전주성 점령(1894년 4월)

 

  • 전주 화약(1894년 6월)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주 화약이라고 한다.

 

  • 집강소 설치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집강소

전라도 지역 53개 고을의 치안 유지와 행정 사무를 담당하게 한 자치 기구이다.

폐정 개혁 12개조

1. 도인(道人)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 교정청 설치(1894년 6월)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조선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 경복궁 점령(1894년 7월 23일)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하였다(군국기무처 설치).

 

  • 청⋅일 전쟁(1894년 7월 25일)

경복궁 점령 이틀 뒤, 마침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 제2차 농민 봉기(1894년 9월)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 우금치 전투(1894년 11월)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결국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1895년).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 삼국 간섭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청에게 할양 받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다.

 

  •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봉건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여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국에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신탁 통치(信託統治)

한민족이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미⋅영⋅중⋅소 4개국이 한반도를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하겠다는 방안

 

  • 국내 반응
    • 우익

우익인 민족주의 진영은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신탁 통치 반대 운동(반탁)을 펼쳤다.

민족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반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승만은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를 조직하고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 좌익

좌익인 공산주의 진영은 초기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3국 외상 회의 결정의 본질이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에 있다고 보고,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입장(찬탁)을 바꾸었다.

일제 강점기
국어 연구
  • 조선어 연구회(1921년)

3⋅1 운동 이후 국문 연구소의 전통을 이어 이윤재, 최현배 등은 조선어 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이란 잡지를 간행하여 그 연구 성과를 정리, 발표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1926년)을 정하고 우리말쓰기를 권장함으로써 한글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조선어 학회(1931년)

조선어 연구회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7학년도(2026) 9월 모의평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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