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 문제
4. (가), (나) 시기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 (가) 고종 18년 자주부사 최춘명은 몽골군이 침입해 성을 포위하자 향리와 백성을 거느리고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몽골 원수 살리타가 이 일을 힐책하자 우리 조정에서는 최춘명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성문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 우왕 14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중략)… 이성계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요동 정벌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을 괴롭혀 원망이 하늘에 이르렀으므로, 나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최영은 유배되었다. |
①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② 사비 천도가 단행되었다.
③ 수원 화성이 축조되었다.
④ 정동행성 이문소가 폐지되었다.
⑤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이 강요되었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가) 1232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했다.
(나) 고려 말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①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1921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사비 천도가 단행되었다.
538년 백제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수원 화성이 축조되었다.
조선 정조 때 수원 화성이 축조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정동행성 이문소가 폐지되었다.
1356년 고려 공민왕 때 정동행성 이문소가 폐지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이 강요되었다.
1937년 일제 민족 말살 통치 시기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이 강요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 고려 몽골의 침입 |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225년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은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킴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
1236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송문주가 죽주성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 종결. 1270년, 고려 원종 때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
1270년 몽골과 강화를 맺은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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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공민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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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건국 |
고려 말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년)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역성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우왕과 최영을 몰아 내고 실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1391년)을 실시하였다.
신흥 무인 세력과 급진 개혁파는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13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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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패한 일제는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고(훈춘 사건),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였다.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1920년 간도 참변 이후 독립군은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으로 조직되었다.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시련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재정비하였다. 이들 3부는 한인 사회를 자치적으로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 등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압록강 연안 지역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남만주 지린성과 봉천성 일대를 담당했다.
북만주 지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1925년 일제와 만주 군벌은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다.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양세봉 등이 중심이 된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된 혁신 의회는 해체된 후,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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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성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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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정조의 탕평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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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공황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제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하나로 묶는 경제 블록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노동력과 자원은 일제에게 보다 철저히 수탈당하였다. 그 후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만주사변), 더 나아가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강행하면서 한국을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그리고는 식민 정책을 강화하여 우리 민족을 더욱 탄압하였고, 모든 방면에 걸쳐 식민지 수탈 정책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 국왕에 대한 숭배 사상을 주입하는 민족 말살 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효율적으로 동원하려는 의도였다.
일제는 만주 점령 이후 만주를 농업 원료 지대로, 한국을 중화학 공업 지대로 설정하고 조선 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일본에 필요한 공업 제품의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면화의 재배와 면양의 사육을 시도하는, 이른바 남면 북양 정책을 수립하였다.
일제는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본격적으로 인력과 물자의 수탈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 정신을 뿌리뽑기 위해 이른바 일⋅선 동조론을 주장하였고,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창씨개명 1940년), 황국 신민 서사 암송(1937년),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941년 소학교의 명칭을 ‘황국 신민 학교’라는 뜻의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일제는 제3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 교육을 사실상 폐지(선택 과목)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했다.
1940년에는 한글을 사용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신문을 폐간하였다.
1930년대부터 일제는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행동은 물론이고 사상까지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시기, 중일전쟁 후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침략 전쟁에서 한국인의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 조선 연맹을 조직하였다. 연맹의 가장 하부에는 애국반을 조직하였고, 반상회를 통해 일본어 사용, 전쟁을 위한 애국 저금 등의 정책을 홍보하였다. 1940년 초 일제가 강점기 막바지에 여성의 노동력을 얻기 위해 몸뻬를 고안해 냈다. 1936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은 <치안 유지법> 위반자 중 집행 유예, 형 집행 종료 또는 가출옥한 사람을 대상으로 2년간 보호 관찰을 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었다. 1941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은 이에 더 나아가서 <치안 유지법>을 위반하여 형에 처해진 경력이 있는 자를 그 집행을 마치고 석방된 이후에도 필요한 경우 검경이 법원의 영장 없이도 자의적으로 계속하여 구금하거나 일정하게 제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반인권적 조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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