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학년도 수능 한국사 9번 해설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9번 문제

9. (가)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① 3.1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② 순종의 장례일을 기해 일어났다.

③ 학생 김주열의 사망으로 격화되었다.

④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주도하였다.

⑤ 신간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1929년 10월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여 발생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자, 광주 지역의 성진회와 각 학교 독서회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 학생 운동은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었으며, 12월에는 서울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① 3.1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19년 3.1 운동에 일어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순종의 장례일을 기해 일어났다.

1926년에 발생한 6.10 만세 운동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학생 김주열의 사망으로 격화되었다.

1960년에 발생한 4.19 혁명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주도하였다.

1884년에 발생한 갑신정변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신간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다.

신간회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으며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배경

6·10 만세 운동을 계기로 학생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학생들은 독서회 등 각종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으며 동맹 휴학 등 저항 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한국인 중심 교육 제도 확립, 식민지 교육 및 한·일 학생 사이의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였다.

 

  • 발단

1929년 10월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여 발생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 전개

경찰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자, 광주 지역의 성진회와 각 학교 독서회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 학생 운동은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었으며, 12월에는 서울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학생들은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확립’, ‘식민지 교육 철폐’, ‘일본 제국주의 타도’, ‘민족 해방’을 주장하였으며, 1930년 3월까지 전국에서 시위와 동맹 휴학을 지속하였다.

 

  • 구호
400의 용사! 우리들의 투쟁이 점점 전개되어 가나, 투쟁은 단순히 전남에만 한정한 일이 아니다. …… 전 조선 수백만의 학생 대중은 우리들의 승리를 기다리고 2,000만 민족은 우리들의 성공을 눈물을 머금고 갈망하고 있다.

학생·대중이여 궐기하라!
검거된 학생은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사회 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식민지적 노예 교육 제도를 철폐하라!

 

  • 신간회의 참여

신간회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으며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다.

 

  • 의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3·1 운동 이후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6·10 만세 운동

  • 배경

1920년대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민족 지도자들의 독립 운동이 크게 제약을 받는 가운데 학생들은 강연, 연극, 야학, 농촌 계몽 활동 등을 통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 섰다.

또, 학생들은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고, 일본인 교사의 한국인 멸시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 전개

1926년 4월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 공산당은 학생 단체, 천도교 일부 세력과 힘을 모아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인 6월 10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으나, 학생들은 일제 경찰의 감시를 뚫고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격문을 뿌리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기출 자료

전세계 피압박 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 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000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보통학교 용어는 조선어로!

 

  • 의의

학생 운동이 식민 통치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이 운동을 함께 준비하면서 민족 유일당(민족 협동 전선)을 만들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신간회 창립에 기여하였다.

3⋅1 운동
  • 국제 정세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이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제시했다.

민족 자결주의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 국외 독립 선언 및 활동

1917년 7월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조소앙 등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주권론을 제기하며 새로운 임시정부 결성의 필요성을 제의・제창한 최초의 선언문이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는 국외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 39인이 무오 독립 선언서(대한 독립 선언)를 발표하여 일제에 대한 육탄 혈전을 결의하였다.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 2. 8.).

 

  • 고종의 죽음

1919년 1월에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고,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 3⋅1 독립 선언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 인사들은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하고,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최남선이 작성하고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3⋅1 독립 선언서(기미 독립 선언문)를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서울과 지방의 여러 도시에 몰래 배포하였다.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후, 거리에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오등(吾等)은 자(自)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告)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告)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금일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3⋅1독립 선언서-

 

  • 확산

서울, 평양, 원산, 의주 등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참여한 계층도 학생, 농민, 노동차, 상인, 교사 등 다양하였다.

3월 중순을 지나면서 만세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만세 시위는 점차 무력 저항 운동으로 바뀌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군청, 면사무소, 헌병 경찰 주재소 등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으며, 수탈에 가담한 일본인 지주 등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만세 시위는 국외로도 확산되었다. 간도와 연해주, 하와이 등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은 거의 어디에서나 일어났다.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국내의 3⋅1 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곧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를 벌였다.

 

  • 일제의 탄압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보복성 학살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린 나이로 충청남도 천안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유관순은 구속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 3⋅1 운동의 의의 및 영향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어, 일제는 폭력적인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민주공화제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가 높아지면서 무장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3⋅1 운동은 중국의 5⋅4 운동 등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자유 대회가 열렸다.

4·19 혁명
  • 배경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미국의 경제 원조 감축에 따른 경기 침체 등으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 제4·5대 정·부통령 선거

1960년 제4·5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내세웠다.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시되었으나, 당시 80세가 넘은 이승만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므로, 부통령 선거가 큰 관심을 받았다.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 선거를 준비하였다.

 

  • 2·28 민주 운동

이승만 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야당 부통령 후보 연설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 조치를 내리자, 이에 반발한 대구 지역의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 3·15 부정 선거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과정에서 대대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시민들은 부정 선거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선거 당일에 마산, 광주, 서울 등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열었다.

 

  • 김주열 열사

1960년 4월 11일,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시위는 격화되었다.

 

  •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부정 선거와 독재 정치를 규탄하며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 비상계엄 선포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자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 대학교수 시국 선언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도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하였다.

 

  • 이승만 하야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라고 발표한 뒤, 대통령직에서 하야를 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 허정 과도 정부 수립

4·19 혁명 이후 허정을 중심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다.

 

  • 제3차 개헌

양원제 국회(참의원, 민의원)와 내각 책임제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였다.

 

  • 의의

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후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갑신정변
  • 배경

임오군란 후 청의 내정 간섭과 민씨 정권의 친청 정책으로 급진 개화파의 개화 정책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개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얻으려 하였으나, 차관 교섭이 실패로 끝나면서 급진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마침 청은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절반을 철수하였다.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타 민씨 정권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로 하였다.

 

  • 전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사대당 요인들을 살해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뒤,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마련하였다(1884년).

 

  • 개혁 정강 주요 내용

청과의 의례적 사대 관계를 폐지하고, 입헌 군주제적 정치 구조를 지향하면서,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을 실시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 지조법(地租法)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생산량 기준이 아니라 토지 가격에 따라 부과하는 방식. 종래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려는 방안으로, 일본에서 실시된 것을 수용한 것이었다.

  • 혜상공국(惠商公局)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

갑신정변 때의 14개조 정강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 3일 천하

개화당 정부의 개혁은 청이 정변을 진압하고 일본군이 약속을 어기고 철수하면서 3일 천하로 끝이 났다.

정변을 주도하였던 급진 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결과
    • 한성 조약

조선은 일본의 강요로 배상금 지불과 공사관 신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다.

    • 톈진 조약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이 철수할 것, 그리고 장차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미리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국과 동등하게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었다.

    • 청의 내정 간섭 심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에 대한 청국의 내정 간섭이 더욱 강화되었다.

 

  • 갑신정변의 의의

갑신정변은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다.

 

  • 갑신정변 이후 정세
    • 거문도 사건

갑신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때 조러 비밀 협약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년).

    • 조선 중립화론

이렇듯 열강의 조선 침략이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인 부들러나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 등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논의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5학년도(2024)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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