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학평 고1 3월 모의고사 한국사 5번 기출 해설

문제

5. 자료를 활용한 탐구 주제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머리카락을 밀어 네모 모양으로 남기고 옆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린 것이 당시의 변발이다. 왕은 변발한 채 서북면에 행차하여 공주를 맞이하였다.
  • 제국 대장 공주가 염승익 등에게 명령하여 공녀를 선발하게 하였다. 염승익 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민가를 마구 수색하니 딸이 없는 사람도 불안에 떨었다.

① 삼국의 항쟁 과정

② 신라 말 왕위 쟁탈전의 전개

③ 원 간섭기 고려 사회의 변화

④ 조선 후기 삼정이정청의 설치 목적

⑤ 일제 강점기 산미 증식 계획의 결과

 

출처: EBSi 홈페이지

문제 해설

고려의 원 간섭기의 변발 유행과 공녀에 대한 내용이다.

 

정답은 ③번이다.

 

원의
내정간섭
원의 일본 원정 – 고려는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

정동행성 – 원은 일본 원정을 계기로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간섭

관제 변화 –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하고, 6부는 4사로 통폐합되었으며, 중추원은 밀직사로 격하

영토 상실 –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 설립

공녀 – 원은 공녀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감

응방 –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

원 간섭기
사회 변화
권문세족 등장 –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이 권문세족으로 성장

몽골풍 – 고려 사회에는 몽골풍이 유행하여 변발, 몽골식 복장, 몽골어가 궁중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짐

고려양 –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의 풍습이 몽골에 전해졌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일컬음

삼국 간의 항쟁
  • 4세기 말 ~ 5세기
    • 고구려 – 신라

400년,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렀다.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 행사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이 광개토 대왕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호우명 그릇).

호우명 그릇

 

    • 고구려 – 백제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

충주 중원 고구려비

백제는 수도인 한성이 함락된 후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신라, 가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 6세기
    • 백제 성왕

551년 신라와 힘을 합하여 이전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하지만 동맹국인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에 빼앗겼다.

554년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였다.

 

    • 신라 진흥왕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를 세웠다.

신라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창녕 진흥왕 순수비(또는 척경비)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비

단양 적성비

  • 가야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금관가야가 신라 법흥왕에 멸망하였고(532년), 대가야는 신라 진흥왕에 멸망하였다(562년).

통일 신라 말
정치 변동
  •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들의 다툼이 시작되어 결국 혜공왕은 살해를 당하였다.
  • 김헌창의 난 – 무열왕의 후손으로서 내물왕의 후손인 원성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한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과 그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 장보고의 난 – 청해진을 지키던 장보고가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고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장보고는 신무왕 즉위에 공을 세웠으나 귀족의 견제를 받아 살해당하였다.
  • 원종과 애노의 난, 적고적의 난 – 지방에서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1811년)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철종 때에 진주에서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1862년)는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 삼정이정청 설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
  • 배경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공업이 더욱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식량 문제에 부딪혔다.

이에 일제는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여 그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 내용

일제는 다수확 품종으로 벼 종자를 개량하고 비료 사용을 확대하였으며, 농토를 개간하고 밭을 논으로 바꾸었다.

또한 저수지나 제방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 수리 조합을 조직하였다.

 

  • 결과
    • 증산량 보다 많은 수탈량

일제는 쌀이 목표대로 증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에 따라 우리 농민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기아 선상에 허덕이게 되었다.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생산되는 값싼 잡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 식민지 지주제 강화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들은 토지를 집적함으로써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했다.

 

    • 농민의 어려움

당시 우리 농민은 수리 조합비, 증산에 투입된 운반비 등도 부담함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받았고, 생계는 더욱 어려워져 갔다.

더욱 가난해진 많은 농민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만주 지역 등 해외로 떠나게 되었다.

 

    • 쌀 중심의 단작 농업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쌀 가격 변동에 취약한 쌀농사 위주의 단작 농업이 정착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학년도 3월 고1 학평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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