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2번 기출문제

문제

2. (가)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① 대조영이 건국하였다.

②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③ 금관가야를 정복하였다.

④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⑤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출처: EBSi 홈페이지

문제 해설

자료의 비석은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충주 고구려비이다.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은 고구려의 왕이었다.

 

① 대조영이 건국하였다.

발해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과전법은 조선의 토지 제도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금관가야를 정복하였다.

신라 법흥왕은 금관가야를 정복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백제 무령왕은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고구려
광개토 대왕
  • 400년,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렀다.
  •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을 차지
  • 후연 등을 격파하여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
  • ‘영락’이라는 연호 사용
고구려
장수왕
  •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
  • 414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 대왕릉비를 세움
  • 427년 평양 천도
  •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 함락,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힘
  •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충주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음
삼국 간의 항쟁
  • 4세기 말 ~ 5세기
    • 고구려 – 신라

400년,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렀다.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 행사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이 광개토 대왕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호우명 그릇).

호우명 그릇

 

    • 고구려 – 백제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

충주 고구려비

백제는 수도인 한성이 함락된 후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신라, 가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 6세기
    • 백제 성왕

551년 신라와 힘을 합하여 이전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하지만 동맹국인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에 빼앗겼다.

554년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였다.

 

    • 신라 진흥왕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를 세웠다.

신라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창녕 진흥왕 순수비(또는 척경비)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비

단양 적성비

  • 가야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금관가야가 신라 법흥왕에 멸망하였고(532년), 대가야는 신라 진흥왕에 멸망하였다(562년).

발해 건국
대조영
  • 698년,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 건국
  •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당나라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
  •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
조선
과전법
  • 과전법

과전법은 공양왕 3년(1391년)에 실시된 토지 제도로, 조선 시대의 기본적인 토지 제도가 되었다.

과전법은 국가의 재정 기반과 조선의 건국에 참여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과전은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죽은 관료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받았던 토지 중 일부를 수신전, 휼양전 등으로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였고,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과전법에서는 과전의 지급을 경기도에 있는 토지로 한정하였다.

과전(科田)

관리에게 준 토지로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 직전법

과전법에 의해 토지가 세습되자, 새로 관직에 나간 관리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세조 12년(1466년) 직전법으로 바꾸어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 관수관급제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과전법의 경우에는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수조권을 가진 양반 관료가 이를 남용하여 과다하게 수취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성종 1(1470년) 때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거두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 직전법 폐지

1556년 직전법이 폐지되어 수조권 지급 제도가 없어졌다.

신라
법흥왕
  • 병부의 설치, 율령 반포, 공복의 제정
  • 6세기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 때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
  • 골품 제도를 정비
  • 진골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두어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춤
  •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
  • 이사부에 명하여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
  • 17관등제를 완비
백제
무령왕
  •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 강화
  •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국교를 맺고 문화 교류
  • 백가의 난을 평정하고 왕권을 강화
  • 무령왕릉의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음

무령왕릉

무령왕릉 무령왕비 금제 관식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릉 석수

무령왕릉 금동 신발

무령왕릉 은잔

 

기출 문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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