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학년도 6월 모의고사 한국사 20번 해설 – 통일을 위한 노력

20번 문제

20.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3점]

① 정전(휴전) 협정이 조인됐어.

②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어.

③ 6.15 남북 공동 선언이 채택됐어.

④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됐어.

⑤ 남북한이 국제 연합[UN]에 동시 가입했어.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마침내 평양에서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또, 금강산 관광(1998년)이 시작되었고 경의선 연결, 개성 공단 건설, 남북 이산 가족 상봉 등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① 정전(휴전) 협정이 조인됐어.

이승만 정부 때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미국, 북한, 중국이다.

휴전협정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어.

박정희 정부 때인 1972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에는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 제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6.15남북 공동 선언이 채택됐어.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됐어.

미군정기 때인 1947년 열린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미국과 소련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 연합에 넘겨 국제 사회의 결의에 따라 해결하자고 제안하였다.

반면 소련은 두 나라 군대가 동시 철수한 다음 한국이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도록 맡기자고 맞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남북한이 국제 연합[UN]에 동시 가입했어.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김대중 정부
  • 평화적 여야 정권 교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 외환 위기 극복

김대중 정부는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강도 높은 기업 구조 조정을 진행하였다.

노사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해 김영삼 정부 말부터 김대중 정부 초까지 국민 금 모으기 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외환 위기 극복 노력을 통해 2001년에 구제 금융을 조기 상환함으로써 국제 통화 기금(IMF)의 관리에서 벗어났다.

 

  • 남북 화해

김대중 정부는 남북 화해를 위해 햇볕 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평양을 방문하였고, 제1차 남북 정상 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 노벨 평화상 수상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했다.

 

  • 2002 한·일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다.

통일을 위한 노력

  • 이승만 정부

6·25 전쟁 발발 이후 남북 간의 적대 관계는 더욱 심해졌다. 이승만 정부는 무력에 의한 북진 통일을 내세웠다.

 

  • 장면 정부

4⋅19 혁명 직후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 협상론, 남북 교류론 등이 제기되었다.

장면 내각은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UN 감시 하의 남북한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을 내세웠다.

대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등을 외치며 남북 학생 회담을 열 것을 주장하였다.

 

  • 박정희 정부

초기 박정희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선 건설, 후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 닉슨 독트린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냉전이 완화되고 국제적으로도 평화와 공존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남과 북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 8⋅15 선언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8⋅15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북한에 대해서 평화적으로 선의의 체제 경쟁을 제의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평화 정착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 남북 적십자 회담

1971년 남북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추진하였다.

 

    •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에는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 제시되었다.

또한 남북 조절 위원회를 설치하여 통일 방안을 논의하였다.

서울·평양간 상설 전화가 개설되었다.

이후 남한은 유신 헌법,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며 7·4 남북 공동 성명을 독재 체제 강화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 6⋅23 평화 통일 선언

1973년 남북 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과 호혜 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3 평화 통일 선언이 발표되었다.

 

  • 전두환 정부

1980년대에 이르러 남한의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과 북한의 고려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 방안이 제시되었다.

1984년에는 서울에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이 원조 물자를 보내왔으며, 이후 남북 경제 회담, 적십자 회담 등이 성사되었다.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져 남북한의 이산 가족이 각각 서울과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 노태우 정부
    • 7·7 선언

1988년 노태우 정부는 자주·평화·민주·복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나갈 것을 천명하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약칭 7·7 선언)을 발표했다.

 

    •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 아래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제안했다.

 

    • 남북 기본 합의서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1991년 남북한은 정부 당국 사이의 공식적인 합의를 통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남북 기본 합의서는 남북한 정부 간에 최초의 공식 합의서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상호 불가침에 합의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적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천하여 민족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제7조 남과 북은 서로의 긴밀한 연락과 협의를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판문점에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운영한다.

제9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제12조 남과 북은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 운영한다.

제15조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전체의 복리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원의 공동개발, 민족 내부 교류로서의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

제22조 남과 북은 경제와 문화 등 각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실현하기 위한 합의의 이행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 경제교류·협력 공동위원회를 비롯한 부문별 공동위원회들을 구성·운영한다.

 

  • 김영삼 정부(문민정부)

1994년 김영삼 정부는 화해와 협력, 남북 연합, 통일 국가 완성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경수로 사업(1994년).

 

  •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 햇볕 정책

김대중 정부는 한반도 평화 정책과 남북 교류 확대를 위해 적극적인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인 ‘햇볕 정책’을 추진하였다.

 

    • 6⋅15 남북 공동 선언

2000년 마침내 평양에서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또, 금강산 관광(1998년)과 경의선 연결, 개성 공단 건설, 남북 이산 가족 상봉 등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합의 내용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남북 경의선 철도 복원 기공식

2000년 9월 18일 남북 경의선 철도 복원 기공식이 있었다.

 

  • 노무현 정부(참여정부)
    • 개성 공단

2003년 개성에 남한 기업들의 공단을 착공·조성하였다.

 

    • 남북 경제 협력 협의 사무소

2005년 개성에 남북 경제 협력 협의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 10⋅4 남북 공동 선언

노무현 정부도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2007년 평양에서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가져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 공동 선언)을 하였다

 

  • 문재인 정부
    •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

2018년 2월 강원도 평창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 입장하였다. 또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였다.

 

    • 2018 제1차 남북 정상 회담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1차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선언을 채택했다.

 

    • 2018 제3차 남북 정상 회담

2018년 8월 평양에서 3차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했다.

6⋅25 전쟁
  • 배경
    • 미국·소련 군대 철수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 38도선 무력 충돌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 중국의 공산화 및 중·소의 북한 지원

1949년 10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공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중국은 물론 소련에서도 군사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 6⋅25 전쟁 전개
    •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 유엔군의 참전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동시에 북한군의 전력 분산을 위한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1950년 11월 1일, 국군∙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최대로 북진하였다.

 

    • 중공군 참전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 후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고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 1·4후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전세는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 국민 보도 연맹 학살 사건

6·25전쟁이 발발하자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인 국민 보도 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 정전 협정
      • 소련의 정전 제안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국제 연합(UN)에 정전을 제안하였다.

 

      • 정전 회담 쟁점

정전 회담의 주요 쟁점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했다.

 

      • 반공 포로 석방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2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정전 회담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미국, 북한, 중국이다.

휴전협정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년).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6년)

신탁 통치안에 대한 격렬한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신탁 통치 문제와 한국의 임시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소련측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단체들로만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미국측은 모든 정치 단체를 참여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의견 대립으로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고,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7년)

1947년 열린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도 미국과 소련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 연합에 넘겨 국제 사회의 결의에 따라 해결하자고 제안하였다.

반면 소련은 두 나라 군대가 동시 철수한 다음 한국이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도록 맡기자고 맞섰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7학년도(2026) 6월 모의평가 한국사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