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번 문제
19. (가)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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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기념비는 지평리 전투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 낸 유엔군 프랑스 대대와 한국군 장병을 기억하기 위해 한국에서 만든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 파리에 세워진 오른쪽의 프랑스군 (가) 참전 기념비를 본떠 제작되었고, 기단부에는 전투에 참여한 한국과 프랑스 군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평리 전투는 (가)에서 중국군의 참전 이후 유엔군이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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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아관 파천이 단행되었다.
②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③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④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다.
⑤ 국가 재건 최고 회의가 조직되었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가)에 해당하는 전쟁은 1950년에 발생한 6.25 전쟁이다.
① 아관 파천이 단행되었다.
1896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 발생 직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국가 재건 최고 회의가 조직되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일부 군인들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군사 정변 세력은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고 군정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 6⋅25 전쟁 |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1949년 10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공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중국은 물론 소련에서도 군사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동시에 북한군의 전력 분산을 위한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1950년 11월 1일, 국군∙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최대로 북진하였다.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 후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고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전세는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인 국민 보도 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국제 연합(UN)에 정전을 제안하였다.
정전 회담의 주요 쟁점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했다.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2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정전 회담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미국, 북한, 중국이다. 휴전협정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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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개혁 |
삼국 간섭 등으로 박영효가 실각한 뒤,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은 낭인을 동원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 후 친일 성향의 제 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을미개혁이 추진되었다.
개항 이후 계속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6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을미의병과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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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국권 피탈 |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이후, 1903년 러시아가 압록강에 위치한 용암포를 강제로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조짐을 보이자 대한 제국은 ‘전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일본이 인천항과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러·일 전쟁 발생 직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 소속으로 고시하였다.
일제는 러·일 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한국 식민지화 방안을 확정하고, 이어서 제1차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와 재정 분야에 그들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일제는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다.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일본이 뤼순항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등 전쟁의 승기를 잡자,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일 전쟁이 종결되었다.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였다.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은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바꿨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
일제는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았고, 1910년 경찰권을 빼앗았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왔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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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공민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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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군사 정변 |
장면 내각 시기에 전개된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과 정부의 군비 축소 계획에 대해 일부 군인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일부 군인들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군사 정변 세력은 군사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고, 반공을 국시로 내건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으며,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군사 정변 세력은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고 군정을 시행하였다.
1961년 군사 정변 세력은 5·16 군사 정변 직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였다.
군사 정변 세력은 정치 정화법을 제정하여 주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였다.
군사 정변 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 구성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 투표로 확정하여 공포하였다.
군사 정변 세력은 민주 공화당을 창당했다.
군사 정변 당시 군부 세력은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박정희는 전역 직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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