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T 기출] 2012 민경채 상황판단 인책형 12번 해설 – 신라시대 골품제도 진골 성골 6두품

개요

다음은 2012년 국가공무원 민간경력자 일괄채용 (민경채) 상황판단영역 인책형 12번 문제 해설이다.

문제

문 12. 다음은 신라시대의 골품제도에 관한 어느 사학자의 주장이다. 이를 근거로 판단할 때, <보기>에서 옳지 않은 것을 모두 고르면?

신라시대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그 외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로 구성되었다. 골족(骨族)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고, 6두품에서 4두품까지는 상위 신분층이었다. 이 가운데 6두품은 진골에 비해 관직 진출 및 신분상의 제약이 강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득난(得難)으로 불릴 정도로 귀성(貴姓)이었다. 5두품과 4두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국가기관의 잡다한 실무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골품에 따른 신분 등급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진골의 신분이었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 등급 강등되어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한편 3두품 이하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아마도 율령반포 초기에 일반 평민의 신분을 삼분(三分)하였다가 현실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큰 특징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에 상한이 있었다는 점이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진골만이 맡을 수 있었고, 두품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다. 6두품에서 4두품까지는 제6관등인 아찬(阿飡)에서 제17관등인 조위(造位)까지의 관직을 가질 수 있었다. 두품층은 골품제의 신분에 따라 관등이 제한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몇 개의 관등을 더 세분해서 두는 중위제(重位制)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신분제적 성격이 변화하지는 않았다.

<보 기>
ㄱ. 4두품은 상위 신분층에 해당하였지만 5두품보다는 낮은 신분층이었다.

ㄴ. 진골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은 이벌찬이었다.

ㄷ. 골품제도에 불만을 지닌 사람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ㄹ. 성골·진골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강등되는 경우는 없었다.

① ㄱ

② ㄹ

③ ㄱ, ㄴ

④ ㄴ, ㄷ

⑤ ㄷ, ㄹ

 

출처: 사이버국가고시센터

문제 해설

ㄱ. 4두품은 상위 신분층에 해당하였지만 5두품보다는 낮은 신분층이었다.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고, 6두품에서 4두품까지는 상위 신분층이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ㄴ. 진골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은 이벌찬이었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진골만이 맡을 수 있었고,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ㄷ. 골품제도에 불만을 지닌 사람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두품층은 골품제의 신분에 따라 관등이 제한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몇 개의 관등을 더 세분해서 두는 중위제(重位制)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신분제적 성격이 변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ㄹ. 성골·진골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강등되는 경우는 없었다.

진골의 신분이었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 등급 강등되어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2012 민경채 PSAT 상황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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