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5번 기출문제

문제

15. (가)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수신: (가) 제2 지대장 이범석

발신: 미국 전략 정보국[OSS] 중국 사령부 헬리웰

최근 미국 전략 정보국을 폐쇄하라는 명령으로, (가)이/가 한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우려던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유감입니다. 이제 사전트 대위가 귀하를 찾아가 그동안 우리가 함께 추진했던 국내 진공 작전의 종결 작업에 대하여 의논할 것입니다. …(중략)… 전쟁이 더 지속되었더라면 우리의 노력은 한반도의 해방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①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

②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하였다.

③ 인천 상륙 작전을 전개하였다.

④ 고종의 밀명을 받아 조직되었다.

⑤ 인도ㆍ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다.

 

출처: EBSi 홈페이지

문제 해설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총사령관을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작전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일찍 항복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①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하였다.

파병 규모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32만여 명에 달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인천 상륙 작전을 전개하였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고종의 밀명을 받아 조직되었다.

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인도ㆍ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광복군은 미얀마·인도 전선에 참가하여,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포로 심문, 정보 수집, 선전 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1940년대
무장 독립 전쟁

  • 배경

1937년 김구의 한국 국민당,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3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옹호,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7년 김원봉의 주도 하에 조선 민족 혁명당은 다른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는 두 세력의 합작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계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사회주의계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이견 차이로 인해 좌우익 세력의 통일 운동은 결렬되었다.

 

  • 한국광복군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총사령관을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임시 정부의 정규군이 되었다.

 

    • 조선 의용대 합류

1942년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 활동
      •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았던 조선 의용대 일부가 중국 팔로군과 연합한 이후,  한국광복군은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에 근거해 중국 군사위원회의 간섭을 받았다.

1944년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이 폐기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 광복군의 지휘권을 가지면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대일 선전 포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식으로 일제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해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 합병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거듭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倭寇)를 완전히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血戰)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창춘(長春) 및 남경정권(南京政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데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 미얀마·인도 전선 참가

1943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광복군은 미얀마·인도 전선에 참가하여,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포로 심문, 정보 수집, 선전 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 국내 진공 작전

1944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작전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일찍 항복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 조선 의용군
    • 조선 독립 동맹

1942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김두봉이 주도하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였다.

 

    • 활동

조선 독립 동맹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등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민족 혁명당 결성
(김원봉, 조소앙, 지청천 등)
한국 국민당
(김구)
.
조선 민족 혁명당 개편
(김원봉)

탈퇴

한국 독립당
(조소앙)조선 혁명당
(지청천)
조선 민족 전선 연맹 결성
조선 의용대
↓ 분화 ↓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

조선 의용대 본대

(김원봉)

합류

한국광복군
(한국 독립당)
조선 의용군

(조선 독립 동맹)

베트남 전쟁
파병
  • 베트남 전쟁 파병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하였다.

파병 규모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32만여 명에 달하였다.

 

  • 브라운 각서(1966년)

박정희 정부는 파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 경제 개발에 필요한 기술 및 차관을 지원받기로 하였다.

 

  • 베트남 특수

한국은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의 송금, 베트남으로의 군수 물자 수출과 건설 사업 참여 등으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1920년대
무장 독립 전쟁

  • 배경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 봉오동 전투(1920년)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 청산리 전투(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패패한 일제는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고(훈춘 사건),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 간도 참변(1920년)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였다.

 

  • 독립군의 이동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 자유시 참변(1921년)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 3부의 성립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시련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재정비하였다.

이들 3부는 한인 사회를 자치적으로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 등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자료: 우리 역사넷

 

    • 참의부

압록강 연안 지역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 정의부

남만주 지린성과 봉천성 일대를 담당했다.

 

    • 신민부

북만주 지역을 담당했다.

 

  • 미쓰야 협정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이 협정은 일제와 만주 군벌이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 3부 통합 운동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 내용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양세봉 등이 중심이 된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된 혁신 의회는 해체된 후,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창설되었다.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 ↘
혁신 의회
(북만주)
국민부
(남만주)
한국 독립당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당
조선 혁명군
6⋅25 전쟁
  • 배경
    • 미국·소련 군대 철수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 38도선 무력 충돌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 중국의 공산화 및 중·소의 북한 지원

1949년 10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공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중국은 물론 소련에서도 군사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 6⋅25 전쟁 전개
    •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 유엔군의 참전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1950년 11월 1일, 국군∙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최대로 북진하였다.

 

    • 중공군 참전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 1·4후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전세는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 정전 협정
      • 소련의 정전 제안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국제 연합(UN)에 정전을 제안하였다.

 

      • 정전 회담 쟁점

정전 회담의 주요 쟁점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했다.

 

      • 반공 포로 석방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2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정전 회담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미국, 북한, 중국이다.

휴전협정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년).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 독립 의군부(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 대한 광복회(1915년)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 송죽회

평양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송죽회를 결성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학년도 3월 고3 학평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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