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9번 기출문제

문제

19. 다음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① 헌의 6조를 채택하였다.

② 조선 형평사가 주도하였다.

③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 냈다.

④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저항하였다.

⑤ 헤이그 특사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

 

출처: EBSi 홈페이지

문제 해설

1960년대 제4·5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내세웠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과정에서 대대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이를 3·15 부정선거라고 한다.

시민들은 부정 선거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1960년 4월 11일,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시위는 격화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부정 선거와 독재 정치를 규탄하며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① 헌의 6조를 채택하였다.

1898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었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조선 형평사가 주도하였다.

1923년 백정 출신들은 경상 남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 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라고 발표한 뒤, 대통령직에서 하야를 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저항하였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신군부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5월 21일 계엄군은 시위 중인 시민들에게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시위는 더욱 확대되었으며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을 조직하며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저항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헤이그 특사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

1907년 일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4·19 혁명
  • 배경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미국의 경제 원조 감축에 따른 경기 침체 등으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 제4·5대 정·부통령 선거

1960년대 제4·5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내세웠다.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시되었으나, 당시 80세가 넘은 이승만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므로, 부통령 선거가 큰 관심을 받았다.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 선거를 준비하였다.

 

  • 3·15 부정선거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과정에서 대대정인 부정을 저질렀다.

시민들은 부정 선거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선거 당일에 마산, 광주, 서울 등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열었다.

 

  • 김주열 열사

1960년 4월 11일,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시위는 격화되었다.

 

  •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 수만 명이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부정 선거와 독재 정치를 규탄하며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 비상계엄 선포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자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 대학교수 시국 선언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도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하였다.

 

  • 이승만 하야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라고 발표한 뒤, 대통령직에서 하야를 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 허정 과도 정부 수립

4·19 혁명 이후 허정을 중심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다.

 

  • 제3차 개헌

양원제 국회(참의원, 민의원)와 내각 책임제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였다.

 

  • 의의

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후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독립 협회
  • 배경 – 아관파천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 열강의 이권 침탈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독립 협회 창립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년).

  • 독립 협회 활동
    •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 협회는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 자주 국권 운동
    • 만민 공동회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다.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 등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년).

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다.

 

  • 자주 민권 운동
    • 국민 참정권 운동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 자강 개혁 운동
    • 관민 공동회

1898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천인 출신인 백정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 헌의 6조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 중추원 관제 반포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독립 협회의 해산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황국 협회(皇國協會)

전국의 보부상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보수 세력은 이들에게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게 한 다음, 이를 빌미로 독립 협회를 해산하였다.

 

  • 독립 협회의 의의

독립 협회의 활동은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형평 운동

  • 배경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 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다. 학교 입학 통지서에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 조선 형평사 창립

백정 출신들은 경상 남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1923년),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더 나아가 조선 형평사는 다른 분야의 사회 운동 단체와 협력하면서 파업, 소작 쟁의 등에 참가하는 등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구호

공평은 사회의 근본,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자!

 

  • 기출 자료
5⋅18 민주화 운동
  • 배경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 전개

1980년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신군부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광주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계엄군을 투입하였고, 이들은 폭력을 행사하며 무차별적으로 시민들과 학생을 체포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은 시위 중인 시민들에게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시위는 더욱 확대되었으며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을 조직하였다. 전일빌딩245에 계엄군의 헬기 사격 탄흔이 남아 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하였다. 4시 5분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4시 55분 전남도청 진압이 완료되었다.

 

  •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등재

2011년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일제의
국권 피탈
  • 제1차 영·일 동맹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이후, 러시아가 압록강에 위치한 용암포를 강제로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 전시 국외 중립 선언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조짐을 보이자 대한 제국은 ‘전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 러·일 전쟁 발발(1904년 2월)

인천항과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 한⋅일 의정서(1904년 2월)

러·일 전쟁 발생 직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였다.

 

  •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 방안을 확정하고, 이어서 제1차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와 재정 분야에 그들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일본은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일본이 뤼순항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등 전쟁의 승기를 잡자,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제2조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또한 한국에 있는 러시아 제국 신민은 다른 외국인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러시아는 한국 영토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동의한다.

 

  •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1905년 11월)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 헤이그 특사 파견과 고종의 강제 퇴위

1907년 일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년 7월)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

협약 내용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한국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용빙할 수 없다.

 

  • 기유각서

일본은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았고, 1910년 경찰권을 빼앗았다.

 

  • 한⋅일 병합 조약(경술국치, 1910년 8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왔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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