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9. 밑줄 친 ‘개혁’에서 제기된 주장으로 옳은 것은? [3점]
|
청원서 저는 전 참판 김옥균의 아내입니다. 죽은 남편은 25년 전 국정을 개혁하려다 3일 만에 청군의 공격을 받아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남편은 역적으로 몰렸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습니다. …(중략)… 자식을 데리고 남편의 제사를 모시며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니, 몰수하였던 재산을 돌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
① 서경으로 천도하자.
② 현량과를 시행하자.
③ 유신 헌법을 폐지하라.
④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자.
⑤ 미소 공동 위원회를 재개하라.
출처: EBSi 홈페이지
문제 해설
위 자료의 갑신정변에 대한 내용이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사대당 요인들을 살해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뒤,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마련하였다(1884년).
① 서경으로 천도하자.
고려 인종 시기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했다. 또한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1135년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묘청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현량과를 시행하자.
조선 중종 시기 조광조는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의 시행을 주장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유신 헌법을 폐지하라.
1972년 박정희 정부 시기 유신 헌법이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유신 체제는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였다.
재야 인사, 학생 종교인 등을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은 권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신 헌법 폐지를 주장하는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파는 개혁 정강 14개조를 마련하였다.
급진 개화파는 개혁 정강 14개조에서 인민 평등권의 제정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미소 공동 위원회를 재개하라.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에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고 결정하였다.
1946년 서울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 갑신정변 |
임오군란 후 청의 내정 간섭과 민씨 정권의 친청 정책으로 급진 개화파의 개화 정책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개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얻으려 하였으나, 차관 교섭이 실패로 끝나면서 급진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마침 청은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절반을 철수하였다.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타 민씨 정권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로 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사대당 요인들을 살해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뒤,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마련하였다(1884년).
청과의 의례적 사대 관계를 폐지하고, 입헌 군주제적 정치 구조를 지향하면서,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을 실시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개화당 정부의 개혁은 청이 정변을 진압하고 일본군이 약속을 어기고 철수하면서 3일 천하로 끝이 났다. 정변을 주도하였던 급진 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강요로 배상금 지불과 공사관 신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이 철수할 것, 그리고 장차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미리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국과 동등하게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에 대한 청국의 내정 간섭이 더욱 강화되었다.
갑신정변은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때 조러 비밀 협약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년).
이렇듯 열강의 조선 침략이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인 부들러나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 등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논의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
||
| 고려 서경 천도 운동 |
고려 인종 시기 묘청·정지상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다.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묘청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1135년). 이들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
||
| 조선 중종 |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이 일어났다.
연산군이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청렴함과 원리 원칙에 충실한 태도는 남곤⋅심정 등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
||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냉전 체제가 완화되면서 국제적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미국은 주한 미군 병력의 감축을 결정하였다. 이에 반공을 강조하던 박정희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대북 정책이 수정되었고, 1972년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남북 통일을 위한 사회 질서 안정을 명분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비상 국무 회의에서 만들어진 유신 헌법은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로 확정되었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유신 헌법>에서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연임 제한도 없었다.
대통령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간선 선거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대통령에게 긴급 조치권을 부여하여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법률의 효력을 중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1/3 추천권, 국회 해산권, 법관 인사권을 주어 삼권 분립이 무력화되었다.
유신 체제는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였다.
재야 인사, 학생 종교인 등을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은 권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헌 청원 100만 명 서명 운동(1973년), 3·1 민주 구국 선언(1976년) 등을 통해 <유신 헌법> 폐지와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1979년 YH 무역 노동자들이 부당한 공장 폐쇄에 맞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강제로 진압하였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였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는 유신 철폐와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면서 유신 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 |
|||
| 미⋅소 공동 위원회 |
신탁 통치안에 대한 격렬한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신탁 통치 문제와 한국의 임시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소련측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단체들로만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미국측은 모든 정치 단체를 참여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의견 대립으로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고,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1947년 열린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도 미국과 소련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 연합에 넘겨 국제 사회의 결의에 따라 해결하자고 제안하였다. 반면 소련은 두 나라 군대가 동시 철수한 다음 한국이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도록 맡기자고 맞섰다. |
기출 문제 키워드
2026학년도 3월 고3 학평 한국사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2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3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4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5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6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7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8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9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0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1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2번 기출문제
- 2026학년도 학평 고3 3월 모의고사 한국사 13번 기출문제
한국사 시험 모음
- 연표 문제
- 한국사 수능
- 한국사 6월, 9월 모의평가
- 한국사 고3 학평 모의고사
- 한국사 고2 학평 모의고사
- 한국사 고1 학평 모의고사
- 한국사 수능 2점 문제 모음
- 한국사 수능 3점 문제 모음
- 한국사 6월, 9월 모의평가 2점 문제 모음
- 한국사 6월, 9월 모의평가 3점 문제 모음
- 한국사 고3 학평 모의고사 2점 문제 모음
- 한국사 고3 학평 모의고사 3점 문제 모음
- 한국사 고2 학평 모의고사 2점 문제 모음
- 한국사 고2 학평 모의고사 3점 문제 모음
- 한국사 고1 학평 모의고사 2점 문제 모음
- 한국사 고1 학평 모의고사 3점 문제 모음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 한국사 공무원 시험
연표
- 선사 ~ 고조선 역사 연표
- 삼국 시대 역사 연표
- 통일 신라 발해 남북국 시대 역사 연표
- 후삼국·고려 시대 역사 연표
- 조선 전기 역사 연표
- 조선 후기 역사 연표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
- 일제 강점기 역사 연표
- 현대사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