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수능 한국사 14번 해설 – 민립 대학 설립 운동

14번 문제

14. 다음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현재 조선에서 고등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해외로 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소. 하지만 고국을 떠난 유학생의 부지기수는 낯선 거처와 음식은 물론 갖은 고난에 신음하고 있소. 무엇보다 거액의 유학 자금은 학생에게 큰 부담이며, 해마다 유학생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금전의 유출은 무한하오. 민족 전체적으로 대학의 설립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소. 이에 우리는 민립 대학 설립의 책임을 자부하며 이천만 동포에게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의 참여를 호소하오.

①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②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③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에 반대하였다.

④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

⑤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1910년대 한국인 교육은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에 치중되었고,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인도 많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구가 높아졌고, 제2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①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1898년 독립 협회는 관민 공동회를 개최한 후,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고려 인종 시기 묘청·정지상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다.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묘청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1135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에 반대하였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국에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런데 우익인 민족주의 진영은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신탁 통치 반대 운동(반탁)을 펼쳤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

1895년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만들어졌다(1922년 11월).

이를 바탕으로 출범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배경

1910년대 한국인 교육은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에 치중되었고,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인도 많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구가 높아졌고, 제2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 전개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만들어졌다(1922년 11월).

이를 바탕으로 출범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 결과

그러나 일제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방해하고, 잇따른 자연재해로 모금 운동이 어려워지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교육하고 한국인의 교육열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독립 협회
  • 배경 – 아관파천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 열강의 이권 침탈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독립 협회 창립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년).

  • 독립 협회 활동
    •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 협회는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독립 협회는 독립관에서 교육과 산업 진흥, 자주독립 등의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민중을 계몽하였다.

 

  • 자주 국권 운동
    • 만민 공동회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다.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 등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년).

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다.

 

  • 자주 민권 운동
    • 국민 참정권 운동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 자강 개혁 운동
    • 관민 공동회

1898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 헌의 6조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 중추원 관제 반포(1898년)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독립 협회의 해산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황국 협회(皇國協會)

전국의 보부상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보수 세력은 이들에게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게 한 다음, 이를 빌미로 독립 협회를 해산하였다.

 

  • 독립 협회의 의의

독립 협회의 활동은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고려
서경 천도 운동
  • 서경 천도 운동

고려 인종 시기 묘청·정지상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다.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 묘청의 난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묘청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1135년).

이들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 이 사건은 실제로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 이것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국에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신탁 통치(信託統治)

한민족이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미⋅영⋅중⋅소 4개국이 한반도를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하겠다는 방안

 

  • 국내 반응
    • 우익

우익인 민족주의 진영은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신탁 통치 반대 운동(반탁)을 펼쳤다.

민족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반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승만은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를 조직하고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 좌익

좌익인 공산주의 진영은 초기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3국 외상 회의 결정의 본질이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에 있다고 보고,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입장(찬탁)을 바꾸었다.

항일 의병 운동
  • 을미의병(1895년)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 활빈당

을미의병의 활동 후, 1900년을 즈음하여 해산된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침략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활빈당은 양반·부호, 관청, 장시 등을 습격하여 무기와 재물을 약탈하고, 그 중에서 일부를 빈민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과 행상, 유민, 노동자, 걸인 등으로 조직되었다.

활빈당 요구 사항

  • 시급히 방곡령을 실시할 것.
  •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엄금할 것.
  •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均田)을 실시할 것.
  • 다른 나라에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을사의병(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익현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 을사늑약에 대한 항거
    • 안중근 의사

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1909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 이재명

이재명은 명동 성당 앞에서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 민영환 순국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 5적 암살단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을사 5적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 시티븐스 저격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 정미의병(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결정되자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였고, 해산된 군인들이 일본군과 서울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각 지방의 해산 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 13도 창의군(1908년)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이 때, 의병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여,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웠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남한 대토벌 작전(1909년)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 투쟁은 그 후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학년도(2025)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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