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학년도 수능 한국사 8번 해설 – 신미양요

8번 문제

8. (가) 사건의 영향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삼별초가 조직되었다.

②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③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다.

④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다.

⑤ 전국 각지에 척화비가 건립되었다.

 

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문제 해설

1866년 대포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미국 선원들은 횡포를 부렸고, 이에 분노한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군함과 병력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였다(신미양요).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는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가 격렬하게 항전하였으나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① 삼별초가 조직되었다.

고려 무신 정권기 최우가 설치한 군사 조직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660년,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각각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다.

1925년 일제와 만주 군벌은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전국 각지에 척화비가 건립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했다(1871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 대포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미국 선원들은 횡포를 부렸고, 이에 분노한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 신미양요

1871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군함과 병력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였다(신미양요).

 

    • 전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는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가 격렬하게 항전하였으나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선 대원군이 통상 수교 협상에 응하지 않자 미군은 퇴각하였다.

척화비 건립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했다(1871년).

이러한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서양 세력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았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척화비

고려
무신정권기
  • 무신정변

1170년, 의종이 개경 부근의 보현원에서 놀이를 즐길 때를 이용하여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귀양 보낸 다음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

무신 간 내분으로 정중부가 피살되고,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됨.

중방 – 최고위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

무신 집권자의 변화: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

 

  • 최충헌

최씨 정권의 성립 – 1196년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4대 60여년간 최씨 정권이 지속됨

명종 때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

교정도감 – 희종 때 설치된 최씨 정권 최고 권력 기구.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 최우

아버지인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1225년)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

서방을 설치하여 유명 문신을 머무르게 하며 정권 운영의 고문을 담당

고려 고종은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몽 항쟁을 위해 강화 천도

삼별초 설치 – 삼별초는 도방과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 무신 정권 시기 봉기
    • 김보당의 난

1173년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에서 무신 정권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의종의 복위를 추진했지만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 조위총의 난

1174년,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킴. 이의민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여 상장군이 됨

    • 망이·망소이의 난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

    • 김사미·효심의 난

1193년,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킴

    • 만적의 난

1198년, 고려 신종 때 개경에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 사전 발각 후 실패

    • 이연년 형제의 난

1237년, 고려 고종 때 원율과 담양 지역에서 이연년 형제가 봉기를 일으켰다. 김경손이 이를 진압했다.

백제, 고구려
멸망
  • 642년, 신라는 백제가 침략해 오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연합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 648년 김춘추가 당으로 건너가 당과 군사 동맹을 맺음. 김춘추는 당 태종으로부터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약속 받음.
  • 660년,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의 결사대를 격파한 후 김유신의 신라군과 소정방의 당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 멸망
  •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고구려 멸망
  •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안동도호부 설치

1920년대
무장 독립 전쟁

  • 배경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 봉오동 전투(1920년)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 청산리 전투(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패패한 일제는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고(훈춘 사건),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 간도 참변(1920년)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였다.

 

  • 독립군의 이동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 자유시 참변(1921년)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 3부의 성립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시련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재정비하였다.

이들 3부는 한인 사회를 자치적으로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 등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자료: 우리 역사넷

 

    • 참의부

압록강 연안 지역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 정의부

남만주 지린성과 봉천성 일대를 담당했다.

 

    • 신민부

북만주 지역을 담당했다.

 

  • 미쓰야 협정(1925년)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1925년 일제와 만주 군벌은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다.

 

  • 3부 통합 운동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 내용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양세봉 등이 중심이 된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된 혁신 의회는 해체된 후,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창설되었다.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 ↘
혁신 의회
(북만주)
국민부
(남만주)
한국 독립당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당
조선 혁명군
6⋅25 전쟁
  • 배경
    • 미국·소련 군대 철수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 38도선 무력 충돌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 중국의 공산화 및 중·소의 북한 지원

1949년 10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공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중국은 물론 소련에서도 군사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 6⋅25 전쟁 전개
    •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 유엔군의 참전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동시에 북한군의 전력 분산을 위한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1950년 11월 1일, 국군∙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최대로 북진하였다.

 

    • 중공군 참전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 후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고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 1·4후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전세는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 국민 보도 연맹 학살 사건

6·25전쟁이 발발하자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인 국민 보도 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 정전 협정
      • 소련의 정전 제안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국제 연합(UN)에 정전을 제안하였다.

 

      • 정전 회담 쟁점

정전 회담의 주요 쟁점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했다.

 

      • 반공 포로 석방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2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정전 회담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미국, 북한, 중국이다.

휴전협정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학년도(2025)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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