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21번 기출 해설

문제

21. 밑줄 그은 ‘이 전란’ 이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신숙주가 일본에 다녀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였다.

② 나세 등이 화포를 사용하여 진포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③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④ 조선 정부의 교역 제한에 반발하여 사량진 왜란이 일어났다.

⑤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강화 교섭의 결렬로 왜군이 1597년에 다시 침략한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을 이끌며 큰 활약을 했다.

 

① 신숙주가 일본에 다녀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였다.

조선 세종 시기 신숙주가 일본에 다녀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나세 등이 화포를 사용하여 진포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고려 말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 하구) 해전에서 왜구를 격퇴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은 일본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4년).

또한 160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조선 정부의 교역 제한에 반발하여 사량진 왜란이 일어났다.

사량진 왜란은 1544년 조선 중종 시기 경상도 통영시 사량진에서 일어난 왜인들의 약탈사건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16세기 중종 초에 삼포왜란을 계기로 비변사가 임시 회의 기구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임진왜란
  • 배경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 임진왜란 발발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지만 패배

 

  • 이순신과 수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 사용

 

  • 의병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된 지역을 수복.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함.

 

  • 육군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 방어(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패배시킴(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 훈련도감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 임진왜란의 영향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
  • 교린 정책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신 접대를 위해 한양에 동평관을 두었다.

 

  • 쓰시마 섬 정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 3포 개항과 계해약조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 해동제국기

세종 때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의 명령에 따라 쓴 견문기이다.

고려의
화약 무기 제조
  •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
  • 최무선은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 하구) 해전에서 왜구를 격퇴
조선 후기
일본과의 관계
  • 일본의 국교 요청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 조선인 포로 송환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4년).

또한 160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 기유약조

조선은 동래부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년).

1678년 부산 초량에 왜관이 건설되었다.

 

  • 통신사 파견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에는 400~500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 을릉도와 독도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조선
비변사
  • 배경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면에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3사의 기능이 바뀌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 비변사의 설치

비변사는 16세기 중종 초에 삼포왜란을 계기로 임시 회의 기구로 설치되었다.

명종 시기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관이 되었다.

 

  • 비변사의 기능 강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5년 제74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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