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24번 기출 해설

문제

24. (가) 왕이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1점]

①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

② 호포제를 시행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였다.

③ 문신을 재교육하기 위한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다.

④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고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⑤ 각 궁방과 중앙 관서의 공노비 6만여 명을 해방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정조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했다.

 

①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

조선 효종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호포제를 시행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문신을 재교육하기 위한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다.

조선 정조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고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조선 철종 시기 임술 농민 봉기 진압 후에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고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각 궁방과 중앙 관서의 공노비 6만여 명을 해방하였다.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노비안이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이름만 있을 뿐 신공을 받아 낼 수 없게 되자, 조선 순조 때에 중앙 관서의 노비 6만 6000여 명을 해방시켰다(1801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조선 후기
정조의 탕평 정치
  • 조선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 탕평 정치 시행
  • 초계문신제 실시 –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
  • 규장각 설치 – 규장각은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구. 서얼 출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
  • 장용영 설치 –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
  • 수원 화성 건설
  • 신해통공 실시 –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도성 안에서 시전 상인이 아닌 난전의 상업 활동 허락
  •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규장전운’, ‘무예도보통지’ 등 수많은 책 편찬
  • 중국에서 <고금도서집성> 수입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정묘호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 병자호란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 북벌 운동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나선 정벌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 안동 김씨 축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가문의 중심 인물들을 몰아내고 당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

 

  • 비변사 기능 축소·폐지

세도 정권의 핵심 권력 기구로 왕권을 제약하였던 비변사를 축소하여 사실상 폐지하였다.

 

  • 의정부와 삼군부 부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하여 행정권과 군사권을 나누어 맡도록 함으로써 권력 독점을 견제하였다.

 

  • <대전회통>, <육전조례> 편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 경복궁 중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 원납전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거두었다.

 

  • 당백전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물가가 크게 오르기도 하였다. 무리한 경복궁의 중건은 양반과 백성의 불만을 샀다.

 

  • 서원 철폐

흥선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이에 지방 유생들과 양반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만동묘가 이때 철폐되었다.

 

  • 호포제

군역 면제 대상인 양반을 포함하여 모든 가구에 군포를 동등하게 부과하게 하였다.

 

  • 사창제

환곡을 개혁하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철종 때에 진주에서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1862년)는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 삼정이정청 설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
노비의 해방
배경 – 노비의 신분 상승조선 후기에 노비는 군공과 납속 등을 통하여 부단히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노비종모법 – 노비의 신분 상승 추세는 아버지가 노비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으로 삼는 노비종모법이 실시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공노비 해방 – 18세기 후반, 공노비의 노비안이 도망과 합법적인 신분 상승으로 이름만 있을 뿐 신공을 받아 낼 수 없게 되자, 순조 때에 중앙 관서의 노비 6만 6000여 명을 해방시켰다(1801년).

노비제 종말 – 갑오개혁(1894년) 때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제는 법제상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5년 제74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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