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제7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24번 기출 해설

문제

24. 밑줄 그은 ‘이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박위가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②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③ 곽재우가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④ 김윤후가 처인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시기 있었던 전투이다.

 

① 박위가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고려 후기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조선 후기 병자호란 시기에 대한 설명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곽재우가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에 대한 설명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김윤후가 처인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고려 시대 몽골이 고려를 침임했을 때 김윤후가 처인성 전투에서 몽골군에 승리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임진왜란
  • 배경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 임진왜란 발발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 이순신과 수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

 

  • 의병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 육군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하였으며,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물리쳤다(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 훈련도감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 임진왜란의 영향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왜구의 침입 공민왕 때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음

최영, 이성계 등이 나서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를 격퇴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이 성장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정묘호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 병자호란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 북벌 운동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나선 정벌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고려
몽골의 침입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

몽골의 1차 침입 –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킴

몽골의 2차 침입 –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

몽골의 5차 침입 –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

피해 –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

개경환도 –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 종결. 1270년,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항쟁 –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듦.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전투

삼별초 – 최우가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으로 구성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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