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41번 기출 해설 – 김구

문제

41.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점]

① 흥사단 결성

② 남북 협상 추진

③ 조선 의용대 창설

④ 조선 건국 동맹 조직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① 흥사단 결성

안창호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남북 협상 추진

1948년 2월,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 한국 임시 위원단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결정되고, 미군정은 5월 총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선거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 남북의 분단이 계속될 것을 우려하여 남북한이 협상을 통해서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 등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조선 의용대 창설

김원봉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조선 건국 동맹 조직

여운형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의열 투쟁

  • 의열단

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 (1923년)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 목표

의열단은 일제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5파괴, 7가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5파괴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보사(조선 총독부 기관지),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7가살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지주와 자본가

 

    • 활동

김익상 –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 – 1924년 일본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

 

    • 활동 변화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원들은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 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년)을 주도하였다.

 

  • 한인 애국단
    • 배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 이후 침체를 겪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만보산 사건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이다.

 

    • 이봉창의 의거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 윤봉길의 의거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이때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요 장성과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 의의

한국 애국단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크게 호전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직되는 토대가 되었다.

건국 준비와
한국 독립의 약속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윤봉길 의거 이후 큰 활력을 얻었다. 그러나 더 강화된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상하이를 떠나야만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여러 차례 이동을 거듭한 끝에 충칭에 정착하였다.

 

  • 한국 독립당 재창당

1940년 김구의 한국 국민당,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3당은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 한국광복군과 김구 주석

1940년 임시 정부는 중국 충칭에 정착하여, 총사령관을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임시 정부는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김구 주석

 

  • 건국 강령 제정

1941년 임시 정부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여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강령에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정 수립, 토지와 대기업 국유화, 의무 교육 제도 시행, 노동권 보장 등이 내용은 담았다.

 

  • 조선 의용대 합류

1942년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은 조선 민족 전선 연맹(민족 혁명당 후신)의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 대일 선전 포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식으로 일제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작전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일찍 항복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개헌 변천과정
구분 연도 정부 형태
제1차 개정헌법 1919년 대통령중심제
제2차 개정헌법 1925년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
제3차 개정헌법 1927년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지도체제
제4차 개정헌법 1940년 주석 중심의 단일지도체제
제5차 개정헌법 1944년 주석·부주석 체제

 

  • 조선 독립 동맹

화북 지방으로 이동한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42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김두봉이 주도하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등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 조선 건국 동맹

국내에서도 건국 준비 활동이 시작되었다.

1944년 여운형, 안재홍 등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조선 건국 동맹이 만들어졌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여운형은 독립 선언서를 준비하고, 무장 세력도 조직하면서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시도하였다.

조선 건국 동맹은 일제 타도를 위한 대동단결, 민주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 국제 사회의 한국 독립 약속
    • 카이로 선언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카이로 회담에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참석하였다.

3국 대표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최초로 한국의 독립이 약속된 것이다.

 

    • 얄타 회담

1945년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얄타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 포츠담 선언

1945년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독일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카이로 선언에서 결정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한다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남북 협상

  • 배경

1948년 2월,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 한국 임시 위원단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결정되고, 미군정은 5월 총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 김구, 남북 협상 제의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선거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 남북의 분단이 계속될 것을 우려하여 남북한이 협상을 통해서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 등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다.

김구의 3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1948. 2.).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무슨 단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자주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이때 어찌 개인이나 집단의 사리사욕을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수 있으랴?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남북 연석 회의

1948년 4월, 평양에서 김구와 김규식, 김일성과 김두봉 등이 참석하는 남북 연석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 서간도(남만주) – 삼원보, 신한민촌, 경학사,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국권 피탈 이후 서간도로 이주한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등은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였고, 이곳에서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를 세웠다.

지치 기관인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서로 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이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 북간도 – 서전서숙, 명동 학교, 중광단

북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은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고 간민회 등의 자치 단체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었다.

이상설, 김약연 등은 각각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종교는 북간도로 거점을 옮겼고, 서일 등 신자 중 일부가 무장 독립 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개편하였다.

 

  • 북만주 – 한흥동

이상설, 이승희 등은 북만주 밀산부에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 연해주 – 신한촌,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외 한인 단체인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고, 이동휘 등이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 중국 – 동제사, 박달 학원, 신한 청년당 김규식, <대동단결선언>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1912년), 박달 학원(1913년) 등이 조직되었다.

1912년 7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은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동제사는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중시했고, 중국의 각종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100여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5년 베이징에서는 신규식, 박은식 등이 신한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신규식, 조소앙 등이 국민 주권론과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 미주 – 대한인 국민회, 흥사단, 대조선 국민 군단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05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에네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 생활을 하였다. 1910년에는 숭무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안창호 등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13년에는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다.

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

  • 배경

일제가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독립군은 보다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 한·중 연합 작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 ↘
혁신 의회
(북만주)
국민부
(남만주)
한국 독립당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당
조선 혁명군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 한국 독립군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의 일부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한국광복군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 조선 혁명군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신개령 전투, 통화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 중국 관내의 무장 독립 전쟁
    • 민족 혁명당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만주 일대에서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의 연결선상에서 김원봉, 조소앙, 지청천 등이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 혁명당 결성에는 김구를 제외한 한국 독립당,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 혁명당, 대한독립당 등이 참여하였다.

 

    • 한국 국민당

1935년 민족 혁명당에 합류하지 않은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 조선 민족 혁명당

의열단의 김원봉의 전권 장악에 반발한 한국 독립당계(조소앙)와 신한 독립당계(지청천 또는 이청천)가 탈퇴한 후, 민족 혁명당은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개편됐다.

탈퇴한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을 재건했다.

탈퇴한 지청천(또는 이청천)은 조선 혁명당을 재건했다.

 

    • 조선 민족 전선 연맹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민족 혁명당은 다른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 조선 의용대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아래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가 김원봉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조선 의용대는 일본군의 정보 수집, 포로 신문, 후방 교란, 심리전 등을 수행하였다.

 

      • 분화

조선 의용대는 항일 투쟁에 대한 노선이 나뉘어져 분화되었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원하는 조선 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결성했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김원봉을 포함한 조선 의용대 본대 잔류 인원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민족 혁명당 결성
(김원봉, 조소앙, 지청천 등)
한국 국민당
(김구)
.
조선 민족 혁명당 개편
(김원봉)

탈퇴

한국 독립당
(조소앙)조선 혁명당
(지청천)
조선 민족 전선 연맹 결성
조선 의용대
↓ 분화 ↓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

조선 의용대 본대

(김원봉)

합류

한국 독립당
한국광복군

 

  •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전쟁
    • 동북 인민 혁명군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 곳곳에 만들어진 항일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하였다(1933년).

 

    • 동북 항일 연군

이후 동북 인민 혁명군은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반일 세력을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1936년).

 

    • 조국 광복회

동북 항일 연군 내의 한 부대로 편성된 한인 유격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조국 광복회를 결성하였다(1936년).

1937년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 아래 함경도 보천보의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보천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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