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45번 기출 해설 – 제주 4.3 사건

문제

45. (가)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①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였다.

② 좌우 합작 7원칙이 발표되는 배경이 되었다.

③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무력 진압에 저항하였다.

④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 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제주도민은 이에 반발하여 경찰을 규탄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강압적으로 대응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의 남조선 노동당 등 좌익 세력이 단독 선거 반대, 미군 철수,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①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 마련 등을 이유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1964년 한·일 국교 회담에서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 정당한 배상 등에 대한 요구보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였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대일 굴욕 외교로 평가하고 범국민적인 정권 퇴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좌우 합작 7원칙이 발표되는 배경이 되었다.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단독 정부 수립에 따른 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무력 진압에 저항하였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신군부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5⋅18 민주화 운동).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하였다. 4시 5분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4시 55분 전남도청 진압이 완료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9년 12월 15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④번이다.

 

제주 4·3 사건
  • 배경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 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제주도민은 이에 반발하여 경찰을 규탄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강압적으로 대응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 무장봉기

1948년 4월 3일, 제주도의 남조선 노동당 등 좌익 세력이 단독 선거 반대, 미군 철수,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 결과

군경과 무장대 간의 무력 충돌로 5·10 총선거 당시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국원의원 선출을 하지 못해 무효 처리가 되었다.

또한 군경의 대규모 진압 작전 결과, 2만 명이 넘는 제주도민들이 희생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9년 12월 15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
  • 배경

박정희 정부는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 마련 등을 이유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 김종필·오히라 회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 오히라 외무대신이 만나서 일본이 한국에 경제 협력 자금이라는 명목의 지원금과 유·무상 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 6·3 시위(1964년)

한·일 국교 회담에서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 정당한 배상 등에 대한 요구보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였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대일 굴욕 외교로 평가하고 범국민적인 정권 퇴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휴교령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 한·일 협정

1965년 박정희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서는 독도 영유권에 관한 문제가 다뤄지지 않았다.

좌우 합작 운동
  • 배경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 좌우 합작 운동(1946년)

단독 정부 수립에 따른 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다.

미군정도 한국인의 지지를 얻고 소련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좌우 합작 위원회를 지원하였다.

 

  • 좌우 합작 7원칙

좌우 합작 위원회는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벌 등에 대한 좌우익의 의견을 절충하여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미 군정은 이 원칙을 근거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좌우 합작 7원칙 중 신탁 통치, 토지 개혁, 친일파 처벌 문제 등에서 좌익과 우익의 의견이 충돌하였다.

 

  • 여운형 암살

그러다 여운형이 한치근에 의해 암살되면서 좌우 합작 운동은 중단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
  • 배경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 전개

1980년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신군부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광주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계엄군을 투입하였고, 이들은 폭력을 행사하며 무차별적으로 시민들과 학생을 체포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은 시위 중인 시민들에게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시위는 더욱 확대되었으며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시민군을 조직하였다. 전일빌딩245에 계엄군의 헬기 사격 탄흔이 남아 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하였다. 4시 5분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4시 55분 전남도청 진압이 완료되었다.

 

  •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등재

2011년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5년 제7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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