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회 한능검 심화 21번 해설 – 조선 후기 사회

21번 문제

21. 다음 가상 대화가 있었던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점]

① 주자감에서 공부하는 학생

② 초량 왜관에서 교역하는 상인

③ 팔관회에 참석하는 외국 사신

④ 빈민을 구휼하는 제위보의 관리

⑤ 빈공과를 준비하는 6두품 출신 유학생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후기 허균의 홍길동전, 춘향전 등의 한글 소설이 유행하였다. 또한 한글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가 등장했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상평통보가 발행되었다.

 

① 주자감에서 공부하는 학생

발해는 중앙의 최고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초량 왜관에서 교역하는 상인

1609년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

1678년 조선 후기, 부산 초량에 왜관이 건설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팔관회에 참석하는 외국 사신

고려 시대 불교 행사인 팔관회가 열렸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빈민을 구휼하는 제위보의 관리

고려 광종 때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빈공과를 준비하는 6두품 출신 유학생

통일 신라 시대 일부 6두품 인물들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빈공과에 합격한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발달
  • 한글 소설의 보급

허균의 홍길동전, 춘향전 등. 한글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가 등장했다.

세책가에서 도서를 대여했다.

  • 판소리

판소리 작품으로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 다섯 마당만 전하고 있다. 신재효는 19세기 후반에 이런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하였다.

장시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는 판소리와 탈춤 공연이 인기를 얻었다.

  • 탈놀이

탈놀이와 산대놀이는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와 함께 성행하였다. 이런 가면극에서는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승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 사설 시조

이 시기의 시조에는 서민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 시사(詩社) 조직

역관 등 중인층과 서민층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호인들이 모여 시사를 조직하였다.

  • 정약용

정약용은 삼정의 문란을 폭로하는 한시를 남겼다.

  • 박지원

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의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 회화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풍속화와 민화가 유행하였다.

조선 후기
화폐 유통
  • 상평통보 유통

조선 후기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상평통보

 

  • 전황 발생

이 시기에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 신용 화폐 등장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환, 어음 등의 신용 화폐가 점차 보급되어 갔다. 이는 이 시기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과 상업 자본의 성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관계
  • 일본의 국교 요청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 조선인 포로 송환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4년).

또한 160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1607년 부산 두모포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 기유약조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년).

1678년 부산 초량에 왜관이 건설되었다.

 

  • 통신사 파견

일본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에는 400~500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 을릉도와 독도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남북국의 교육
  • 통일 신라
    • 국학

통일 신라에서는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유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그 후,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으로 고쳤다.

 

    • 독서삼품과 실시

원성왕 때에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

이 제도는 골품 제도 때문에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였지만, 학문과 유학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 발해
    • 주자감

발해에서는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고려
불교 정책
  • 태조

태조는 개경에 여러 사원을 세웠고, 훈요 10조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할 것을 당부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침을 제시하였다.

팔관회

 

  • 광종

광종 때부터 승과 제도를 실시하여 합격한 자에게는 승계(僧階)를 주고 승려의 지위를 보장하였다.

국사와 왕사 제도를 둠으로써 불교의 권위가 상징적으로나마 왕권 위에 존재하게 되어 불교가 국교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고려
백성의 생활 모습
  • 향도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香徒)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이다.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 의창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 상평창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었다.

풍년에는 곡물을 사들이고 흉년에는 곡물을 풀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 동⋅서 대비원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다.

 

  • 혜민국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하게 하였다.

 

  • 구제도감·구급도감

각종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 제위보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 혼인과 여성의 지위

고려 시대에는 여자는 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에 혼인을 하였다.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친족 간의 혼인이 성행하였다. 중기 이후 여러 번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인 형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 여성의 지위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그 소생 자식의 사회적 진출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통일 신라 말 호족과
6두품의 성장
  • 배경

8세기 후반 이후,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다.

지방 세력들도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 호족의 성장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 6두품의 성장

6두품 출신들은 신라 중대에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였다.

또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빈공과에 합격한 경우도 있었다.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강수, 설총, 최치원은 대표적인 6두품 출신이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9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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